대개는 내용이 차야 형식이 만들어지지만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특히 국가 대 국가의 관계, 외교에서 그렇다. 외교에서 의전을 중시하는 이유도 형식을 통해 내용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중국 어선을 단속하던 해경 단정이 7일 침몰하자 정부는 불법 행위에 관용을 베풀지 않는 단호한 대응을 하겠다고 10일 밝혔다.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공해로 불법 어선 추적범위를 확대하기로 했고 필요하면 해경 함정에서 함포도 쏘기로 했다. 이에 앞서 국민안전처는 9일 중부해양경비안전본부장이 주한 중국대사관의 부총영사를 불러 중국 어선의 공권력 도전 행위에 ‘강력 항의했다’고 밝혔다.
해경 본부장은 치안감으로 중앙부처 국장급이다. 반면 부총영사로 알려진 중국 외교관이 사실은 영사 문제를 담당하는 사무관인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해경 간부가 자신보다 2계급 이상 낮은 상대방을 불러 놓고 한 항의를 ‘강력했다’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불러서 얘기를 듣는다’는 의미의 초치(招致)에는 징벌의 의미도 없다. 중국 사무관으로서는 한국 정부가 불렀으니 가서 얘기를 듣고 그 말을 그대로 본국에 전하면 그만인 것이다.
중국 사례가 과도한 포장으로 눈살을 찌푸린 의전이라면 미국 사례는 지나치게 ‘몸 사리는’ 의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셸 플러노이 전 미 국방차관은 미국의 안보 전문가 대표단을 이끌고 16일 방한해 1주일 동안 한국에 머물렀다. 플러노이 전 차관은 힐러리 클린턴 미 민주당 대선 후보의 최측근으로 차기 국방장관으로 유력시되는 인물이다. 언론의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1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국방부 청사에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을 잇달아 만났다. 당시 면담은 기자단에게 사전 공지돼 있던 상황. 하지만 면담 직전 외교부는 “면담을 공개할 수 없으며 대표단이 청사에 들어서는 사진도 찍을 수 없다”라고 밝혔다. 시간 맞춰 기다리던 기자들이 허탈해한 건 당연했다. 한국과 협잡하러 온 것도 아닌데 외교부는 플러노이 전 차관 일행을 청사 정문이 아닌 비밀통로로 들어와 면담하고 몰래 빠져나가도록 조치를 했다. 플러노이 전 차관 본인이 방한 직전 미국에서 한반도 정책에 대해 시시콜콜 언론 인터뷰까지 한 마당에 무슨 이유로 이런 의전을 하게 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근 외교부에서는 ‘면담은 전면 비공개로 진행한다’, ‘사진 촬영만 하고 인사말도 시작하기 전 기자들은 퇴장한다’라는 식의 의전을 반복하고 있다.
의전을 뜻하는 영어 단어 protocol은 그리스어의 ‘맨 처음’을 뜻하는 proto와 ‘붙이다’라는 의미의 kollen이 합쳐진 것이라고 한다. 격(格)을 갖춘 제대로 된 의전이라야 사람 사이도, 서로의 생각도 잘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행사용 의전은 잘한다는데, 그냥 거기서 끝은 아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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