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A기업 기자간담회에서의 일이다. 사장이자 대표이사인 B 씨는 회사의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자랑했다. 대표적인 예로 사장이든 막내 사원이든 모두 이름 뒤에 ‘님’을 붙여 서로 부른다고 했다. 실제로 그 기업 화장실에는 사장에게 “사장님” 대신 “이름+님”으로 부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B 대표는 발표를 마치고 자리를 뜨며 기자들의 추가 질문을 받았다. 대표 뒤에는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질의응답이 길어지자 비서는 시계와 사장을 번갈아보며 불안해했다. 결국 비서 입에서 나온 말은 “사장님, 빨리 가셔야 합니다”였다.
A기업 말고도 직급에 상관없이 ‘이름+님’으로 호칭을 바꾼 기업은 꽤 있다. 삼성전자도 이번 달부터 ‘○○님’으로 호칭을 통일하기로 했다. 삼성전자 직원이라면 누구나 ‘부회장님’이 아니라 ‘이재용님’으로 불러야 한다. 얼마나 잘 시행될지는 해봐야 알 것이다. CJ그룹은 2000년부터 ‘○○님’으로 호칭을 바꿨다. 벌써 17년 전이다. CJ 임직원들에게 실제로 ‘○○님’으로 부르는지 물어봤다. 대답들을 종합하면 “그때그때 달라요”다. 확실한 건 대화나 회의에서 누군가를 언급할 때는 회장이든 사장이든 ‘○○님’으로 불린다. 하지만 당사자를 직접 부를 때는 여전히 직급이 쓰이기도 한다.
‘○○님’뿐만 아니라 새로운 호칭을 시도하는 기업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영어 이름을 만들어 부르는 게 그중 하나다. 직급을 막론하고 무조건 서로 ‘매니저’ ‘프로’로 부르는 곳도 있다. 여기에는 대리-과장-부장-상무 등으로 이어지는 직급 호칭이 옛날식이란 인식이 깔렸다. 전통적인 직급 호칭이 수직적이고 딱딱한 조직 문화를 야기한다고 보는 것이다.
수직적 문화를 수평적으로 바꾸기 위해 기업들이 호칭 변화를 시도한다고 하니, 사장님으로 부르지 않고 이름 뒤에 님자 붙여 부르는 게 아랫사람을 위한 제도로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꼭 그렇진 않다. 사장이야 부하가 자기를 사장님으로 부르든 ‘○○님’으로 부르든 별 상관이 없다. 어찌 됐든 나는 사장이니까.
하지만 부하 직원들은 다르다. 부담스럽다. 나이가 같은 군대 선임과 후임이 휴가 때 만나면 선임은 후임에게 “편하게 말 트자”고 할 수 있다. 그 제안이 후임에게 반가울까. 호칭 변화를 시도한 회사들 중 상당수 직원들이 그냥 ‘사장님’ ‘상무님’으로 부르는 게 맘 편하다는 말을 한다. 상사와 부하라는 위치가 그대로인데 호칭만 바꾸라고 하면, 불편은 부하의 몫이다.
호칭 변화를 시도했다가 과거 호칭으로 돌아가는 기업들이 있는 건 그런 이유인 듯하다. 포스코는 2011년 매니저, 팀리더 등으로 바꿨던 호칭을 최근 다시 대리, 부장 등 과거 호칭으로 되돌렸다. KT와 한화도 2012년 호칭 변화를 시도했다가 2년 만에 복귀시킨 바 있다.
호칭의 변화가 선진적인 조직 문화를 일구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라는 게 많은 이들의 의견이다. 상사든 부하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말이다. 그리고 호칭이야 뭐가 됐든 부하가 상사를 자주 부르는 문화가 먼저 필요하다. 나를 부르기만 하고 내가 부를 일은 없던 상사의 이름을 갑자기 부르라고 하면 꽤 난감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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