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꼭지를 틀었다 잠갔다, 틀었다 잠갔다. A 씨(39·여)는 똑같은 행동을 수십 차례 반복한 끝에 마침내 찬물을 얼굴에 묻혔다. 거품을 낼 때도 비누를 들었다 내려놓기를 하염없이 반복했다. 세수를 마치는 데 30분 넘게 걸렸다. 강박적인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강박장애 증상이다. A 씨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20년 넘게 이런 증상에 시달렸다.
더 큰 문제는 용변이다. 요의가 와도 화장실에 갈지 고민하다가 참지 못하고 방 안에서, 거리에서 속옷을 적시기 일쑤다. 혼자 옷을 갈아입지 못하니 A 씨의 어머니 채모 씨(63)가 하루 세 번 기저귀를 갈고 씻겨준다. 날이 더우면 피부가 짓무르는 걸 피할 수 없다. 한번은 현관문을 열지 못하고 서성이는 A 씨를 따라 외간 남자가 집 안까지 들어온 적도 있다. ‘그때 혹시 내가 집에 없었더라면….’ 채 씨는 차마 그 이후를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채 씨는 딸을 돌보는 일보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를 생각하는 게 더 고통스럽다고 한다. “내가 없으면 누가 애를 돌보나. 부모가 돼서 그러면 안 되는데, 정말 몹쓸 생각인데, 기도할 때마다 빌어요. (딸이) 나랑 같은 날 가게 해달라고….”
A 씨는 전국 2만4069명의 강박장애 환자 중에서도 증상이 아주 심한 경우다. 국내 최고의 정신건강의학과 의료진이 A 씨를 치료하기 위해 10여 년간 노력했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주치의는 A 씨가 스스로 밥을 먹거나 청결을 유지할 수 없고 적절한 대인관계를 맺을 능력도 없다고 판단해 ‘정신장애 1급’에 해당한다는 소견서를 써줬다.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활동보조인을 지원받거나 관련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A 씨는 장애인 등록을 3차례 거부당했다. 현행 정신장애 판정기준은 조현병, 분열형정동장애, 양극성정동장애, 반복성우울장애 등 4가지 중한 정신질환 환자만 등록 대상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질환은 ‘회복 가능성이 낮고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장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이 기준은 A 씨처럼 혼자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강박장애 환자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던 2000년에 만들어진 뒤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정신장애 기준을 담당하는 보건복지부는 이런 사정을 잘 안다. 다만 현행 기준은 전문가의 의견과 한정된 복지 예산을 고려해 결정된 것이고,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한 연구 용역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엔 심장병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된 주인공이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았다가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에 좌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 마주치는 어떤 공무원에게도 악의는 없다. A 씨가 마주한 세상은 어땠을까. 역시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7년 전 상황에 멈춘 복지제도는 A 씨에게 길이 아닌 벽이 됐다. 그사이 어머니는 “나를 이 세상에서 거둘 때 아이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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