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건혁]박스피의 저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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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혁 경제부 기자
이건혁 경제부 기자
여의도 증권가에서 ‘박스피’(박스권과 코스피의 합성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2014년 3월경이다. 이후 수년간 코스피가 1,800∼2,200 구간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이 말은 한국 주식시장의 특징을 보여주는 상징어가 됐다.

박스피를 처음 쓴 이경수 메리츠종금증권 리서치센터장(당시 신한금융투자 투자전략팀장)은 “증시의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조어인데 지금까지 살아남을 줄은 몰랐다”며 “올해는 박스피의 저주를 끊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올해 시장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연초부터 꾸준히 2,000을 방어한 코스피는 13일 2,100을 돌파했고 이튿날 약 22개월 만에 2,130을 넘었다. 종가 기준 최고 기록인 2,228.96(2011년 5월 2일)과의 차는 100포인트 이내로 좁혀졌다. 상반기(1∼6월)에 역대 최고치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확산되고 있다.

기업 실적도 나쁘지 않다. 상장기업 전체 순이익이 처음으로 100조 원을 넘었다. 국내 최대 기업 삼성전자의 지난해 영업이익 잠정치는 29조2200억 원으로 2013년(36조7900억 원) 이후 두 번째로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센터장은 “이런 정도의 이익을 내는데도 주가가 오르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 정도면 박스피 탈출의 필요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문제는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기업 실적과 우호적인 시장 분위기만으로는 한국 증시를 박스피에 가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기업의 비효율적 의사 결정을 초래하는 정경유착이 한국 증시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고 지적한다. 정경유착의 부패와 기업인에 대한 단죄 같은 정치적 불확실성이 고조될 때마다 증시는 맥을 못 췄다.

코스피는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기간 3.9% 오르는 데 그쳤다. 임기 말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고 탄핵 정국이 이어지면서 증시는 안갯속에 빠져들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정치적 불확실성이 사라지자 한국 증시가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건 정치적 이슈가 시장을 얼마나 억누르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박스피 탈출을 위한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다. 마크 모비어스 프랭클린템플턴자산운용 이머징 마켓그룹 회장은 “한국 정부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개혁과 변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물러나고 차기 정부가 들어선다고 해서 수십 년간 누적된 정경유착의 악습이 한순간에 사라지길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기업의 자율 경영을 보장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확고한 원칙이 우선적으로 마련돼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박 전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하며 ‘기업 경영의 자율권 침해’를 탄핵 인용 사유로 적시했다. 권력이 기업을 좌지우지하고 시장경제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누가 정권을 잡든 이 교훈을 잊는다면 박스피의 저주에 갇힐 수밖에 없다.

이건혁 경제부 기자 gun@donga.com
#박스피#증시#코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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