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8년 전쯤 지독한 두통을 겪은 적이 있다. 두통약을 먹어도 잠시뿐, 먹는 알약 개수는 점점 늘어났다.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 서울 은평구 불광동 의원을 찾았다. 숨소리도 듣고, 증상을 한참 메모하며 듣던 의사는 안경을 벗고, 볼펜을 책상에 놓은 후 말했다.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농담을 하나’, ‘사람을 놀려도 유분수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사의 표정은 진지했다. “운동이든 산책이든 여행이든 무엇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해소 방안을 찾아보십시오.” 약은 처방도 해주지 않았다. 엉뚱한 진단에 ‘별 황당한 의사가 다 있다’며 의원 문을 나섰다.
당시에는 초보 엄마, 초보 기자로서 어려움이 많을 때였다. 밤에 아이가 잘 자지 않으니 수면 부족으로 낮에 신경이 날카로웠다. 서투르게 작성한 기사를 출고하고 나면 회사 선배의 지시 사항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꾸지람도 듣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도 크다 보니 휴대전화 화면에 뜨는 회사 전화번호 앞자리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혼비백산했다.
의사의 한마디가 효과는 있었다. 병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럼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쉽게 생각하고 바로 실행할 수 있는 건 걷기였다. 기사를 마감하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나 짬이 날 때 무작정 걸었다. 도심의 청계천은 찬반 논란이 있긴 하지만 주변 회사원들의 좋은 산책길임에는 틀림없다. 점심을 대신해 샌드위치를 사 들고 청계천 개울가 계단에 앉아 물속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동네의 길가에 잘 가꿔진 화단을 보며 마음을 추스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꽃과 나무,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였지만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생활 속 녹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지난해 기준 1인당 생활권 녹지 면적은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기준에 크게 못 미친다. 어린이나 노인도 걸어서 갈 수 있는 동네의 작은 공원이 필요한 이유다.
서울시도 생활 속 녹지를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시민들이 원하는 만큼은 아니다. 일자리 창출이나 복지에 들어가는 예산에 비하면 시민 모두가 누리는 ‘녹색 복지’는 여전히 ‘홀대’받는다. 이른바 녹화사업에 서울시가 책정한 예산은 전체 서울시 예산의 1%인 연간 3500억 원 정도. 이 중 1000억 원은 이전에 공원용지로 지정된 사인(私人)의 땅을 사들이는 데 쓰인다. 과거에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지정만 해놓았다가 지금에서야 비싼 땅값을 내고 계속 공원으로 유지하는 값이다. 또 이 예산으로는 공원을 늘리는 게 아니라 유지하는 데 급급한 수준이어서 변화를 체감하지도 못한다. 이런 실정에 체계적인 수종(樹種) 관리를 하라거나 눈을 즐겁게 하는 멋진 공공정원을 만들라는 요구는 꿈같은 이야기다.
꽃과 나무를 심고, 공원을 만드는 것을 사치로 여기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그러나 잠시나마 빽빽한 건물 사이 아스팔트 위에서 느끼는 자연의 치유 효과는 크다. 푸른 나무와 꽃을 보고 걸으면 머릿속 복잡함과 화가 발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그때 기자는 은평구 불광동 출입처 인근 근린공원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았다. 벤치에 앉아 새와 꽃을 보며 평화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두통은 시간이 지난 후 사라졌다. 진단은 옳았다. 그 의사에게 감사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