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OUT]새싹 짓밟는 서울 ‘고교야구 정원제’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1일 03시 00분


이승건 스포츠레저부
이승건 스포츠레저부
“6년째 야구를 하고 있습니다. 프로선수가 꿈인데 고등학교도 못 가게 생겼어요. 아이만 받아준다면 감독 앞에 무릎이라도 꿇어야죠.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은 서울 강남의 한 중학교에서 포수로 뛰고 있다. 원래는 내년 인근 고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아들을 받아 주겠다던 고교 감독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학교 방침이라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자녀가 초중학교에서 야구를 하고 있다면 뜯어말려야 할 판이다. 서울시교육청은 4월 ‘학교체육 업무 매뉴얼’을 발표했다. 지금까지 학교 재량에 맡겨 오던 선수 선발 인원을 제한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야구의 경우 총 36명만 허용한다. 전면 실시는 2014년부터라고 했지만 고교에서는 이미 내년 신입생부터 제한한다.

최근 프로야구의 폭발적인 인기와 맞물려 어린 야구선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2004년 20개였던 유소년야구팀은 140개가 넘는다. 이에 비해 중학교 야구팀의 증가는 미미하다. 중학교에 가면서 많은 아이가 야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에 ‘고교야구 정원제’가 비수를 꽂는 형국이다.

시교육청이 이런 방안을 내놓은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학원스포츠 비리 근절이다. 유망주를 뽑기 위해 돈을 주거나 실력이 없는 학생을 입학시키면서 돈을 받아 왔기에 정원 제한으로 뒷돈 거래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학교 운동부 평준화다. 좋은 선수들이 특정 고교로 몰리면서 생긴 학교 간 편차를 인원 제한을 통해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일선 지도자와 학부모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시교육청은 비리 근절을 얘기하지만 자녀의 고교 진학을 위해 ‘못할 게 뭐가 있느냐’는 학부모는 늘고 있다. 전력 평준화는 정원 제한을 통해서가 아니라 뒤처지는 학교에 대한 관심과 효과적인 지원이 바람직한 대안으로 보인다.

서울시 야구협회 김정식 전무는 “시교육청이 일을 추진하면서 우리와는 한 차례 논의도 없었다. 지금 지도자와 학부모들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 ‘없던 일로 해야 된다’는 주장이 대부분인데 시교육청과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그리스 신화의 괴물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의 침대를 기준으로 큰 사람은 잘라 죽이고, 작은 사람은 늘려 죽였다. ‘고교야구 정원제’라는 갇힌 틀이 한국 야구의 미래를 옥죄고 있다.

이승건 스포츠레저부 why@donga.com
#고교야구#정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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