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은 당시 현장에 있던 고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코오롱마라톤팀 소속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고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기쁨보다 일제 마라톤화를 신고 세계를 제패했다는 이 회장의 지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회장은 곧바로 부하 직원들에게 “세계 최고의 마라톤화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황영조는 2년 뒤 히로시마 아시아경기에서 코오롱 액티브 마라톤화를 신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8일 별세한 이 명예회장은 ‘마라톤 예찬가’였고 한국 마라톤의 산증인이었다. 그는 1980년대 초 2시간15분 벽을 깨는 선수에게 5000만 원, 2시간10분 벽을 무너뜨리는 선수에게 1억 원의 포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선수들에게 큰 자극을 줬고 이홍렬은 1984년 제55회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14분59초로 우승해 5000만 원을 받았다. 당시 서울 강남 고급 아파트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황영조는 1992년 벳푸 마라톤에서 2시간8분47초를 기록해 1억 원을 받았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명예회장은 1985년 코오롱 고교구간마라톤대회를 만들었고 1987년 코오롱마라톤팀을 만들어 황영조 이봉주 김완기 권은주 등을 키웠다. 코오롱에서 키운 선수들은 이후 한국 마라톤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이봉주가 2000년 세운 2시간7분20초의 남자 한국기록과 권은주가 1997년 세운 2시간26분12초의 여자 한국기록은 아직도 난공불락이다. 육상인들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이봉주가 나타난 배경에는 이 명예회장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국내에서 이 명예회장같이 마라톤에 애착을 가지고 투자하는 인물이 없었다. 한국 육상을 책임지고 있는 대한육상경기연맹도 하지 못하는 과감한 투자를 아낌없이 해왔다.
한국 마라톤은 정진혁(한국전력)이 2011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9분28초가 현역 남자 최고기록일 정도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최근 국내 마라톤대회 남자 우승 기록이 2시간15분대 이후에서 결정된다. 세계 최고기록이 2시간2분57초로 지구촌 마라톤은 2시간 벽을 무너뜨릴 태세인데 한국 마라톤은 뒷걸음질 치고 있는 형국이다. 뒤로 뛰는 한국 마라톤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제2의 이동찬’은 과연 없는 것인가. 한국 마라톤에 이 명예회장의 빈자리가 더욱 클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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