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OUT]영웅에 대한 배려없는 세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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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영 스포츠부 기자
유재영 스포츠부 기자
지난달 31일 늦은 저녁, 기자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를 완등한 산악인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와 조촐한 저녁을 하고 있었다. 엄 이사는 히말라야에 대한 추억과 히말라야에 자신이 세운 학교(휴먼스쿨)에 대해 얘기했다. 또 영화 ‘히말라야’의 소재가 됐던 2005년 ‘휴먼 원정대’의 실제 활약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따뜻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깨진 것은 엄 이사가 휴대전화로 저녁 뉴스를 본 순간이었다. 자신이 새누리당에서 비례대표 의원직을 제안받았다는 뉴스였다. 엄 이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지만 갑자기 먼저 공개된 데 대한 당혹감이었다. 얼마 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엄홍길 대장과 따로 만나 영입을 제안했다”고 밝혔고 엄 이사의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 인기 있는 사람을 쓰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예의는 지켜야 했다. 의사를 타진하고 답변을 들을 때까지 최소한의 시간은 기다렸어야 했다. 엄 이사가 고사했다면 의사 타진 사실조차 밝히지 않는 것이 예의다.

엄 이사는 그가 만든 ‘엄홍길휴먼재단’을 통해 벌이는 활동이 많아 애초부터 정치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는 이날 저녁 자리에서 “무엇보다 히말라야와 한 약속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살려준 히말라야 지역에 학교를 짓고, 국내에서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국토 대장정이나 봉사 활동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또 “아직 미완공인 학교가 6곳이 있고, 기존 학교도 지속적으로 유지, 관리, 보수를 해야 한다”며 “이 모든 부분을 내가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엄 이사의 주변 사람들도 엄 이사가 정치판에서 상처를 받을 수 있다며 만류했다.

엄 이사는 “그래도 나를 높이 평가해준 건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저녁 자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갑자기 작아 보였다.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한 차례 광풍을 맞아서인지 그렇게 보였다. 엄 이사는 이달 말 제2의 고향인 히말라야로 떠난다.

유재영 스포츠부 기자 elegant@donga.com
#영웅#히말라야#엄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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