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총 쏘는 것이 좋아 저금통을 깨서 장난감 총을 샀던 아이. 자신만의 총을 갖고 싶어서 어머니를 졸라 산 100만 원짜리 중고 총으로 사격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소년은 이제 올림픽에서 5개의 메달(금메달 3개, 은메달 2개)을 목에 건 한국 사격의 간판스타가 됐다.
8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3연패(50m 권총)를 노리는 진종오(37·kt)의 얘기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정식으로 총을 잡은 진종오가 ‘사격 황제’로 불리기까지는 부상이 불러온 큰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겨야 했다. 그때마다 그의 곁에는 재기를 돕고 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묵묵히 땀을 흘린 은사들이 있었다.
○ 집념의 떡잎
강원대사범대부설고에서 같이 운동을 했던 친구들이 대부분 은퇴했을 정도로 세월이 훌쩍 지났는데도 진종오가 꾸준히 기량을 유지하며 세계무대를 호령할 수 있는 것은 목표에 대한 강한 집념 때문이다.
진종오만의 강한 정신력의 기틀을 마련해 준 지도자는 일찌감치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본 고 김명권 감독(전 강원대사범대부설고 코치)이다. 김 감독의 형인 김명석 춘천시사격연맹 회장(52)은 “동생은 제자들에게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가서 낮에 꽂아둔 깃발을 찾아오도록 하는 담력 훈련을 자주 시켰다”고 회상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집중력과 끈기를 유지할 수 있는 진종오의 힘이 길러진 배경이다.
김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기본기부터 착실히 다지던 진종오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왼쪽 쇄골이 골절되며 첫 시련을 맞았다. 그러나 김 감독은 그때 진종오가 부상을 극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대선수로 자라날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라고 지시한 뒤에 병원에 가봤더니 진종오가 실제로 병실 천장에 표적지를 붙여 놓고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싹수가 보였다”고 말했다.
3개월여간의 병원 생활을 털어 버리고 돌아온 진종오에게 김 감독은 원하는 만큼만 운동을 하도록 했다. 진종오는 “하루에 30분에서 1시간 30분밖에 훈련을 못했다. 그러나 사격을 다시 할 수 있게 돼 행복했고, 짧은 시간이지만 즐겁게 사격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사격 자체를 즐기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게 된 진종오는 “총 쏘는 것이 좋아 20년을 즐기다 보니 각종 타이틀(올림픽 메달 등)이 따라왔다”고 말했다.
○ ‘전화위복’이 된 두 번째 부상
부상 회복 후 전국체전 공기권총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진종오는 고교 졸업 후 경남대에 진학했다. 당시 경남대 사령탑이었던 조현진 창원시청 감독(58)은 김 감독에게 진종오를 소개받았을 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조 감독은 “김 감독은 내게 ‘진종오는 재능은 있지만 미완성 단계다. 해병대 출신인 형님 손아귀에서 집중력을 더 키울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진종오가 경남대에 입학한 1998년 조 감독은 진종오의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의 돈 500만 원으로 러시아제 ‘코칭머신(조준과 사격 동작을 컴퓨터로 모니터링하는 장비)’을 사서 훈련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 1학년 진종오에게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축구를 하다 넘어지면서 오른쪽 쇄골이 골절된 것. 오른손으로 총을 쏘는 그에게는 왼쪽 쇄골을 다쳤을 때보다 더 뼈아픈 부상이었다. 부상 정도도 심해 수술을 받고 오른쪽 어깨에 금속 핀까지 박았다. 조 감독은 “당시 진종오는 한창 기량을 키워야 할 시기에 엉뚱하게 다치는 바람에 총을 쏘지 못하는 것을 억울해했다. 사격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걱정했다”고 말했다.
낙담한 진종오에게 조 감독은 “사격이 곧 네 인생이다.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조 감독은 “진종오의 의지에 놀란 것은 그때다. 보통 선수는 1, 2년간 고생할 부상을 3, 4개월 만에 털어내고 복귀했다. 부상 전에는 요령을 피우기도 했지만 복귀 후에는 공격적으로 훈련을 했다”고 말했다. 조 감독은 부상이 진종오의 기량 발전에도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진종오는 총을 세우는 능력(고정 능력)은 타고난 반면에 격발 시간이 오래 걸리고 거칠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부상 이후 오랜 시간 훈련을 못하게 되면서 강한 집중력을 갖게 됐고, 격발 시간도 단축됐다”고 말했다. ○ 사격 역사의 간판을 바꿀 차례
2004 아테네 올림픽 50m 권총 결선에서 진종오는 선두를 달리다가 7번째 발에서 10.9점 만점에 6.9점을 쏘는 바람에 은메달에 그쳤다. 올림픽이 끝난 뒤 사격계에서는 진종오가 많이 흔들린다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조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지인들에게 “진종오는 ‘오뚝이’다. 지금 그의 모습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자”고 말했다. 조 감독은 리우 올림픽을 진종오가 사격 역사를 새로 쓸 기회로 보고 있다. 그는 “진종오는 대학 입학 때까지만 해도 기대주 정도였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는 팀의 최고가 됐다”며 “진종오의 사격 인생이 시작된 고교시절에 ‘선수 진종오’를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제 전 세계가 그를 주목한다. 리우 올림픽에서 사격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설 것”이라고 말했다.
진종오의 첫 사격 지도자인 김 감독은 2014년 2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비보를 접한 진종오는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유족과 함께 빈소를 지켰고, 발인 때는 김 감독의 영정을 들었다.
김 회장은 “진종오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자신의 첫 메달(은메달)을 딴 뒤에 곧장 동생에게 전화를 할 정도로 둘 사이는 각별했다. 발인 당시 진종오는 우리에게 ‘선생님이 많이 그리울 겁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동생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을 거듭한 진종오의 올림픽 3연패를 기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