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 직전까지 ‘말 많던’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큰 ‘탈 없이’ 치러졌습니다. 앞선 올림픽보다 소박했지만 오히려 인간적 감동과 즐거움이 풍부했던 올림픽이었다는 점에서 긴 여운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그건 아마도 리우 올림픽이 우리를 ‘놀이하는 인간’의 본질적 의미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올림픽의 발상지였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무엇이 바르게 사는 방법인가?”라고 자문하고는, “삶을 놀이하면서 살아야 한다. 곧 게임을 하거나, 제례를 기꺼이 지내거나, 노래하고 춤추거나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신을 달랠 수 있고, 적을 당당히 상대할 수 있으며,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고대 사상에서부터 놀이가 인간의 삶에서 본질적이며 고귀한 가치를 지닌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호모 루덴스, 곧 놀이하는 사람의 개념을 정립한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 문화의 다양한 분야를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놀이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그 특성은 놀이의 의미를 성찰하는 데 오늘날에도 되새겨볼 만한 것입니다. 하위징아는 무엇보다도 ‘자발적으로 즐기는 행위’를 놀이의 특성으로 꼽았습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닌 것이죠. 어떤 분명한 목표에 매여서 하는 놀이도 놀이가 아닙니다. 하위징아는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필연적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고 했습니다. 즉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이를 인간 문화의 본질적 요소로 보았던 것입니다.
리우 올림픽에 참가했던 많은 선수들이 다양한 놀이를 자유롭게 즐기려 했던 것 같습니다. 몇몇 우리 선수는 즐기다 보니 좋은 성과를 얻었음을 새삼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스스로 즐기는 행위를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확산되었으면 합니다.
놀이의 또 다른 특징은 ‘질서’입니다. 자유를 논하다 돌연 질서를 말하니까 의아해할 수 있겠지만, 놀이는 질서를 스스로 창조하며 존재합니다.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아무렇게나 노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놀이는 놀이 고유의 과정과 의미를 지닙니다. 시공간의 한계 안에서 놀이는 스스로 질서를 창조하며, 그렇게 창조한 질서 그 자체가 됩니다. 이런 내재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정해놓는 것이 놀이의 규칙입니다. 이런 규칙은 놀이마다 다르지만 어떤 놀이에도 빼놓을 수 없는 규칙이 있습니다. 상대를 인정하라는 규칙입니다. 이에는 당연히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포함됩니다. 리우에서도 이런 규칙을 성실히 지켜 진한 감동을 준 선수들이 있었죠.
그러므로 진정한 놀이는 그 자체로 ‘공정한 놀이(fair play)’여야 합니다. 페어플레이는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룬 놀이가 아니라, 놀이가 놀이이기 위한 기본 조건입니다. 놀이의 자유와 질서의 내적 결합은 또한 놀이가 미적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즐겁고 자유롭게 ‘질서 잡힌 형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열정은 ‘아름다워지려는 경향’, 곧 예술적 성향과 상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어플레이는 아름답습니다.
리우 올림픽은 막을 내렸고 우리는 또 일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놀이는 또한 ‘비일상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 비일상성이 우리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플라톤이 의도했던 것처럼 정신의 확장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음 번 ‘호모 루덴스의 올림픽’ 또한 기꺼이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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