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그의 이름 앞에는 에이스란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가녀린 두 어깨 위에는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부담감이 무거운 짐처럼 얹혀 있었다.
15일 소치 겨울올림픽 여자 1500m에서 은메달을 따고 난 뒤 심석희(17·세화여고)는 “주변의 기대에 부응치 못해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첫 올림픽 출전에서 값진 은메달을 땄지만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18일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막내이자 에이스인 그는 마지막 주자라는 또 하나의 짐을 져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심석희는 “언니들이 부담을 안 느끼도록, 아니 아예 느낄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을 많이 해 줬다”고 했다.
부담을 떨쳐 버린 그는 안정적인 레이스를 펼쳤다. 특히 마지막 2바퀴를 남겨 놓은 상황에서 마지막 주자로 나선 후 보여준 혼신의 힘을 다한 역주는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레이스 막판 교체 타이밍에서 박승희가 심석희의 등을 밀어줄 때 심석희는 잠시 균형을 잃으면서 중국에 역전을 허용했다.
이대로 끝인가 싶었다. 하지만 심석희는 포기하지 않고 무섭게 중국 선수를 추격했다. 그리고 반 바퀴를 남긴 상황에서 마지막 코너 때 아웃코스로 돌면서 리젠러우(중국)를 제쳐 대역전극을 마무리했다.
심석희를 밀어주던 상황에 대해 박승희는 “제가 마지막에 추월을 당해 막내에게 큰 부담을 준 것 같아서 너무 미안했다. 경기가 끝나고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하지만 심석희는 “제 차례가 되자마자 앞으로 더 치고 나가려고 했다. ‘나갈 수 있다. 할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골인할 때까지 최대한 집중했다”고 말했다.
경기 후 중국의 실격이 선언되었기 때문에 만약 역전을 하지 못했어도 한국의 금메달이 확정되었겠지만 이날 심석희가 보여준 역주는 두고두고 남을 명장면이었다. 평소 수줍음을 많이 타는 심석희도 결승선을 통과한 뒤에는 오른손을 흔들며 자축했다.
심석희는 “중국 선수를 앞서고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정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소름이 돋았다. 짜릿하다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고 했다.
결승선을 통과한 뒤 잠시 기쁨을 표하던 심석희는 곧바로 많은 눈물을 얼음 위에 쏟았다. 그는 “그동안 다 함께 고생한 게 떠올랐다. 그래도 마지막에 함께 웃을 수 있어서 기쁜 마음에 눈물이 흘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조해리도, 박승희도, 김아랑도 같은 말을 했다. 4년 전 밴쿠버 올림픽 결선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실격을 당했던 박승희는 “이 자리에 없는 (김)민정 언니, (이)은별 언니도 함께 기뻐해줄 것 같다. 금메달을 빼앗겼던 언니들과 같이 기쁨을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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