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삶을 포기하려한 것만 세 번 이다. 좌절에 빠져 죽음만을 떠올리던 그때 기적처럼 찾아온 희망은 휠체어컬링이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그는 하루 6시간의 맹훈련을 참아낸 끝에 국가대표가 됐다. 죽음을 극복하게 한 컬링과 함께한 ‘제2의 인생’. 이 때문에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을 앞둔 그의 의지는 단단하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다.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서 한없이 애국가를 부르고 싶다. 그래서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 다하는 날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패럴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 중 최고령인 휠체어컬링 대표팀 서드 정승원(60)의 얘기다. 대표팀 맏형인 그는 “큰 형으로서 가장 큰 목소리로 ‘아악!’이라고 기합을 불어넣으며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피눈물을 흘렸던 과거를 패럴림픽을 통해 씻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정승원의 ‘제 1의 인생’은 불의의 사고로 막을 내렸다. 1980년대 건설사에 취직해 10년 넘게 해외 근무를 했던 그는 개인 사업을 하기 위해 1994년 귀국했다. 그때 회사에서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잠깐 나와 일손을 보태달라’는 연락이 왔다. 이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인생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공사 현장에서 떨어진 2톤 무게의 자재에 깔리면서 하반신이 마비됐다. 정승원은 “사람들이 제가 죽은 줄 알고 가마니로 덮어 놓은걸 어머니가 와서 맥을 짚어보고는 살았다고 해서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사고 이후 그는 3년간 병원에 누워만 있었다.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살을 거의 다 떼어냈다. 정승원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고 세 번이나 시도했었다”고 말했다. 정승원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지인의 한 마디였다. “형님 인생을 왜 포기하려고 하세요. 병원 밖에 더 넓은 세상이 있어요. 장애인이 국가대표도 될 수 있는 세상이에요.”
병원을 나온 그는 용기를 내 장애인스포츠에 도전했다. 처음에는 론볼(잔디에서 정해진 표적공에 가깝게 공을 굴리는 경기)을 했다가 휠체어컬링으로 종목을 바꿨다. 정승원은 “컬링을 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휠체어에 앉아만 있으면 장기가 밑으로 처져 오래 살지 못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운동을 꾸준히 한 덕분에 건강도 좋아졌고, 삶에 대한 긍정적 생각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올해까지 정승원의 컬링 경력은 14년. 하지만 패럴림픽 출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승원은 “패럴림픽 선발전에서는 세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그때마다 6개월 정도 잠을 제대로 못잤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한 덕분에 평창 패럴림픽 대표팀에 합류했다. 정승원은 “올해 말이면 환갑이기 때문에 이제 선수생활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번 패럴림픽이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고 말했다. 그는 “안방에서 패럴림픽이 열린다. 우리 팀을 제외한 11개 팀은 손님이라고 생각한다. 손님에게 금메달을 내줄 순 없다”고 덧붙였다.
휠체어컬링 대표팀은 경기 전에 “아리아리”라는 구호를 외친다. 이는 ‘없는 길을 찾아가거나 길이 없을 때 길을 낸다’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정승원은 “내가 휠체어컬링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듯이 앞길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통로에 서 있는 장애인들이 패럴림픽에서 선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새로운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계 7위 한국은 10일 강릉컬링센터에서 미국(세계 6위)과 예선 첫 경기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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