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을 꼭 잡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성화대에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30년 전보다 더 환했다. 이 땅의 첫 번째 패럴림픽이 열렸을 땐 ‘장애인’이란 용어조차 어색했다. 하지만 이번 개회식을 장식한 장애인 문화 콘텐츠는 풍요로웠다. 밝게 타오른 성화는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는 약속의 ‘불꽃’이라고 생각했다.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 개회식이 열린 9일 강원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을 찾은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장(61)은 1988년 열린 서울 장애자올림픽(패럴림픽의 당시 명칭) 개·폐회식에 연출 작가로 참여했다. 당시 개회식에는 장애인 선수들은 등장했지만 장애인 예술인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개회식에서는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 가수 황영택과 휠체어 합창단이 애국가를 부르고 시각장애인 가수 이소정이 아이들과 함께 꿈을 타고 항해했다. 장애인이 주인공이었고, 이들의 힘찬 활동이 감동을 자아냈다.
“우린 서울 장애자올림픽의 유산 위에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그 유산이 불꽃이 되어 성화대에서 빛나고 있네요.”
그 또한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다. 전동기가 없어 손으로 휠체어를 밀어야 했던 당시, 방 회장은 “최종 점화자로 나선 육상 선수 조현희의 휠체어를 여섯 살 딸이 밀어서 점화하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30년 전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개회식에 나온 한 선수가 결혼해 자녀를 두고 있다는 소개가 방송에 나오자 방 회장에게 “장애인도 결혼할 수 있나”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다.
당시 방 회장은 개회식에 사용될 장애인 관련 용어부터 정리했다. 이전까지 장애인을 장애자로, 청각장애인을 농아로, 시각장애인을 맹인으로 불렀다. 휠체어 등 장애인이 사용하던 물품을 두고서도 여러 용어가 혼용됐다. 방 회장은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당시 장애인 관련 용어를 정리하기 위해 국회도서관에서 수개월을 보냈다. 선진국의 장애인 정책 자료도 찾아 헤맸다.
당시 방 회장은 주변에 패럴림픽 개최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다녔다. 당시에는 장애인들조차도 “굳이 큰돈을 써서 대회를 치를 게 아니라 그 돈을 장애인 복지에 써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비판하곤 했다. 이에 방 회장은 먼저 패럴림픽을 개최한 일본의 사례를 들며 맞섰다. “1964년 패럴림픽 개최 이후 일본 사회는 장애인 제도와 시설 등에서 천지개벽을 했습니다. 그 사례를 들며 ‘패럴림픽을 개최하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나 제도를 20년 앞당길 수 있다’며 설득했죠.”
그렇게 국내 첫 패럴림픽 개최를 위해 땀 흘렸던 방 회장이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평창에서 다시 패럴림픽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며 세월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를 느꼈다.
“그 사이 한국 사회는 횡단보도 턱과 계단투성이 공공시설물이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는 경사로로 바뀌는 등 물리적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장애인복지법 등이 마련되면서 장애인의 생활환경도 개선됐죠. 어쩌면 오늘 제가 개회식에서 본 것은 이런 변화상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이번 평창 겨울패럴림픽 조직위원회에서도 2015년에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다. 그는 이번 패럴림픽이 ‘문화 패럴림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 편의 등이 확대되는 것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이 문화적으로 더 큰 역할을 하고 문화적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번 패럴림픽은 인식의 장벽을 없애는 ‘문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무장애)’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문화는 장애인을 정서적으로 포용하죠. 그렇게 한국 사회가 한 번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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