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스포츠] 깍두기에서 패럴림피언까지, 이정민의 무한도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6일 16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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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미국에서 대학을 갓 마친 이정민(34·창성건설)은 그저 평범한 ‘취준생’이었다. 남들처럼 취직할 생각만 했던 그는 조지아주에 있는 한 제조업 회사에 첫 직장을 얻었다. 인사팀에서 1년 반 가량 일하며 사회경험을 쌓았다.

두 번째 직장을 선택했을 때에는 ‘무조건 돈 많이 주는 곳’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영국계 금융회사에 입사했다. 외환중계를 하는 회사였다. 연봉은 많이 뛰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직장인 3년차 병’이 찾아왔다.

같은 일상이 반복되자 매너리즘에 빠진 모습이 보였다. 내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보다 발견한 조정, 이정민은 그렇게 무작정 조정장을 찾아갔다.

이전까지 그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 농구 안 해본 운동이 없지만 그는 허구한 날 ‘깍두기’였다. 친구들과 뛰면 늘 뒤쳐졌다. 10살 때 길랭바레증후군으로 전신마비를 겪은 뒤 운동신경계가 손상이 된 자신의 장애에 대해 그는 잘 몰랐었다.

“‘나도 잘 하고 싶은데 왜 잘 안되지?’ 그런 생각에 화만 났어요. 남자애들은 또 승부욕이 강하잖아요. 괜히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친구들이랑 놀다 싸우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 제 몸이 운동을 잘 할 수 없는 컨디션이었던 거죠.”

국내에서 조정은 장애인 뿐 아니라 비장애인들도 훈련여건이 좋지 않은 종목이다. 연맹에서 제공되는 훈련일수는 1년에 90~100일 뿐이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홀로 헬스장에서 땀을 흘렸다. 진짜 배를 세 번밖에 못 타고도 처음 나간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4년 전 소치 때만 해도 갓 운동을 시작했던 그에게 패럴림픽은, 그것도 겨울패럴림픽 출전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는 당시 선수가 아닌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에서 수여하는 황연대 성취상 위원회에 직원 자격으로 패럴림픽 무대를 경험했다.


이후 안방 인천에서 2014 아시아경기 조정 은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이정민은 그게 선수로서 마지막 커리어인 줄만 알았다. 메달을 땄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없던 지원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인천아시아경기가 끝난 뒤 그는 선수를 그만 둘 생각이었다.

이미 연금보험이며 적금도 깬 지 오래였다. 퇴직금도 다 날아갔고 나이도 더 이상 적지 않았다. 그는 아시아경기를 마치고 때마침 모집한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 국제파트 직원으로 지원도 했다. 당시에는 불행이었고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결과는 탈락이었다.

추운 겨울이면 강도 얼어 배를 못 타는 상황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서울시장애인체육회에 전화를 해 “운동 좀 시켜달라, 방법이 없느냐”고 문의더니 “크로스컨트리팀이 전국체육대회를 준비하는데 거기 가서 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운동이 하고 싶었던 이정민은 그렇게 2015년, 이정민은 태어나 처음 좌식스키를 접했다.

설원 위 마라톤이라 불리는 크로스컨트리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저도 처음 이 종목을 하면서 ‘페이스 조절’이라는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죽기 살기로 가야 되더라고요. 제 평균맥박이 180정도 나와요. 훈련도 훈련이지만 제가 욕심도 많아서 생각대로 잘 안돌아갈 때가 많았어요. 포기하고 싶고 그만 두고 싶은 날들도 정말 많았죠. 그때마다 부모님이랑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잘 응원해주셔서 끝가지 잘 버텼어요. 그분들 생각해서라도 정말 잘 결과를 보여주고 싶어요.”

그는 이번 평창 패럴림픽에서 크로스컨트리와 바이애슬론(크로스컨트리+사격) 장거리 전 종목에 출전 중이다. 패럴림픽 이후 다시 학업을 이어갈 생각인 그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전하는 패럴림픽인 만큼 그는 “한줌의 재가 될 때까지 새하얗게 불 태우겠다”고 다짐한다.

조정을 하는 동안 연세대에서 국제관계 석사를 마친 그는 이달 들어 동대학원 스포츠응용산업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커리어를 고민하다 더 늦기 전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스포츠 외교에 관심이 많은데 정작 스포츠에 관한 지식을 잘 모른다면 제대로 일을 못할까봐 이론적인 부분을 배워야겠다 싶어서 지원했는데 감사하게도 들어가게 됐어요. 패럴림픽 기간에 빠지는 초반 수업은 미리 공문을 드리고 교수님들께 양해를 구했어요. 폐회식 하자마자 수업 가야해요(웃음).”

직장인에서 패럴림픽 선수, 그리고 학업까지. 끝없이 도전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는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조금 덜 게으르게,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해서 살자,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늘 부족한 부분을 느끼게 되더라”고 말했다. 부모님도 이제는 그가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고 도전하는 걸 알아 새로운 일을 벌려도 그저 아들을 믿고 대견스러워 한다.

이정민은 평창에서 10일부터 쉴 새 없이 크로스컨트리, 바이애슬론 경기에 나서고 있다. 지칠 법도 하지만 매일같이 경기장에 찾아와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관중들은 그의 피로회복제다.

“경기장까지 많은 분들이 찾아와 보내주신 진심어린 응원에 정말 큰 힘을 받았어요. 저는 누군가를 저렇게 진심을 담아 응원해본 적이 없는데 제가 그동안 이기적으로 살았구나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첫 경기(바이애슬론 7.5km)에서 11위를 기록한 뒤 이후 경기마다 10위(크로스컨트리 15km)→9위(바이애슬론 12.5km)→7위(바이애슬론 12.5km)로 한 단계씩 순위를 끌어올리고 있는 이정민은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신 만큼 마지막 대회에서는 목표했던 톱5 안으로 마무리 하고 싶다”는 각오를 남겼다.

평창=임보미 기자 b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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