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대결’이라 부를 만했다. 세계 최대 스포츠기구인 국제축구연맹(FIFA) 대 세계 최대 스포츠 국가인 미국의 자존심을 건 한판 대결이었으니까.
숨 가쁜 대결은 일주일 전인 지난달 27일(현지 시간) 오전 스위스 취리히의 고급 호텔 ‘보르오라크’에서 시작됐다. 이틀 뒤 열릴 FIFA 회장 선거를 앞두고 이 호텔에 묵고 있던 FIFA 임원 9명이 뇌물수수 혐의로 스위스 경찰에 체포됐다. 제프리 웹 FIFA 부회장 겸 북중미축구연맹 회장, 에우헤니오 피게레도 FIFA 집행위원회 부회장, 잭 워너 전 FIFA 부회장….
만성적 부패 혐의에도 난공불락이던 FIFA에는 ‘진주만 공습’이나 다름없었다. 전격 체포 작전이 벌어진 스위스는 1998년부터 4년 임기 FIFA 회장을 4차례나 연임했고 재연임도 확실시되던 제프 블라터 회장의 홈그라운드다.
스위스 경찰 뒤엔 미국이 있었다. 로레타 린치 미 법무장관은 체포 작전이 벌어진 날 오후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91년부터 24년간 FIFA 임원들이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부패를 저질러 최소 1억5000만 달러(약 1656억 원)의 뇌물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한 FIFA 임원 9명을 포함해 14명을 기소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이번 수사가 뉴욕 연방검사 출신인 린치 장관과 제임스 코미 FBI 국장 그리고 마이클 가르시아 전 FIFA 윤리위원회 수석조사관 3인방의 3년 된 합작품이라는 점도 밝혀졌다.
미국 수사 당국의 목표는 뚜렷했다. 20년 가까이 세계 축구계를 주물러 온 블라터 회장의 낙마였다. 하지만 블라터는 보란 듯이 29일 선거에서 5선 연임에 성공했다. 단일 도전자였던 요르단의 알리 빈 알 후세인 왕자(40)를 압도적 표 차로 물리치며 건재를 과시했다. 블라터는 역시 ‘언터처블(untouchable)’이란 반응이 흘러나왔다. 자신만만해진 블라터는 30일 미국 수사 당국과 그에 동조한 축구계 인사에게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겠다”고 기염을 뿜었다.
하지만 미국이 괜히 3년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1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개최 대가로 FIFA 북중미 집행위원 몫으로 지급된 1000만 달러를 FIFA 계좌에서 빼 준 장본인이 블라터 회장의 최측근인 제롬 발케 FIFA 사무총장”이라는 뉴욕타임스의 보도가 흘러나왔다. 발케는 이를 부인했지만 2일엔 이를 입증하는 서한까지 공개됐다. 블라터는 결국 이날 사임을 발표했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 개최를 둘러싼 뇌물 스캔들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21년 권좌를 내놓고 물러났지만 사법처리는 면했던 후안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전례를 밟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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