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7일 오후 7시(현지시각)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의 자이드 스포츠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의 ‘2019 아시안컵’ E조 예선 마지막 경기는 중동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2017년 6월 발생한 ‘카타르 단교 사태’로 갈등을 겪는 나라 간 경기였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UAE, 바레인, 이집트와 함께 카타르의 독자적인 외교 및 국정운영을 문제 삼으며 외교관계와 일체의 교류를 중단했다.
실제로 이날 경기에선 카타르 응원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단교로 카타르인의 UAE 방문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UAE는 아시안컵이 열리기 직전인 이달 초 카타르축구협회장이자 아시아축구연맹(AFC) 부회장인 사우드 알 모한나디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아 논란을 초래했다. 당시 모한나디 부회장은 오만 무스카트에서 대기하다 UAE가 당초 방문 예정일보다 하루 늦게 입국을 허락해 UAE에 들어올 수 있었다.
기자는 카타르와 사우디 경기를 카타르 도하 북부에 자리한 쇼핑몰 타와르몰의 레바논 식당 겸 시샤(물담배) 카페 ‘알 다라완디’에서 봤다. 카타르인은 대부분 축구 경기를 마즐리스(Majlis·아랍어로 ‘앉는 장소’를 뜻하는 일종의 사랑방)에서 관람한다. 알 다라완디에는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카타르로 일하러 온 화이트칼라 아랍인이 많았다. 이들 대다수는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인 카타르를 응원했다. 경기가 접전 끝에 2-0 카타르 승리로 끝나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기자의 스마트폰에는 카타르인 친구가 보내온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팬들의 응원도 없는 상태에서 (단교 주도국인) 사우디를 (또 다른 단교국인) UAE에서 이겨 너무 기쁘다.’
국가 브랜드 상승의 수단
카타르, 나아가 중동에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경제가 어려운 비(非)산유국이나 고질적인 내전을 겪고 있는 중동 사람들에게 축구는 훌륭한 스트레스 해소 창구다. 이런 나라의 재능 있는 축구 꿈나무들에게는 ‘풍요롭고 안전한 땅’ 유럽으로 이주하고 거액의 돈도 벌 수 있는 희망의 통로다.
크고 작은 갈등을 겪었거나, 지정학적으로 라이벌 관계인 나라 간 경기는 해당 국민의 애국심 표출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2019 아시안컵에선 사우디와 카타르 간 경기 못지않게 이란과 이라크의 경기도 관심을 끌었다. 비록 예선 탈락했지만 분쟁을 겪는 와중에도 대회에 참가한 팔레스타인, 예멘, 시리아의 경기도 화제가 됐다.
카타르나 UAE처럼 풍부한 원유와 천연가스 덕분에 재정이 넉넉하고,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중동 국가에게 축구는 국가 브랜드 상승의 수단으로 간주된다. 자국의 경제력과 스포츠 분야에서 ‘최고’를 지향한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한 아이템인 것이다.
이번 아시안컵 조별예선전에서 3전 전승, 10득점 무실점으로 최고 성적을 거둔 카타르의 경우 중동 국가로는 처음으로 ‘월드컵(2022)’을 유치한 것을 국가적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자국 프로축구 리그에선 사비 에르난데스(스페인·전 FC 바르셀로나·현 알 사드 SC)와 가비 페르난데스(스페인·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현 알 사드)같이 전성기가 지났지만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던 스타플레이어를 영입해 뛰게 하고 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남태희(알 두하일 SC)와 정우영(알 사드)도 현재 카타르 리그에서 활동 중이다. 이번 아시안컵 조별예선에서만 7골을 넣어 득점 단독선두로 나선 카타르의 알 모에즈 알리도 알 두하일 SC 소속이다. 카타르투자청은 프랑스 리그1을 대표하는 명문팀 파리 생제르맹 FC의 대주주다.
UAE는 1990년대 이후 유일하게 아시안컵을 두 번(1996, 2019)이나 개최한 나라다. 또 북아프리카의 아랍국(이집트, 모로코 등)과 사우디, 이란을 제외하면 중동에선 드물게 월드컵 본선(1990 이탈리아월드컵)에 진출했다. 특히 세계 최고 프로축구 리그로 꼽히는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에서 영향력이 크다. 아부다비 왕실 구성원인 만수르 빈 자이드 알 나하얀은 2008년 프리미어리그 명문팀인 맨체스터 시티(맨시티)를 인수했고, UAE 두바이의 국영항공사 에미레이트항공은 또 다른 프리미어리그 명문팀인 아스널의 경기장(에미레이트스타디움) 건설을 후원해 주목받았다. 이 때문인지 이번 아시안컵 16강 국가 가운데 절반인 8개국이 중동 국가다.
계속될 중동 국가들의 ‘축구 경쟁’
카타르의 경우 축구를 국가 브랜드 전략에 활용하려는 의지가 주변국들에 비해 더욱 강한 편이다. 이 나라가 1990년대 중반 본격적인 개혁·개방에 나서면서부터 지향한 ‘중동의 교육·문화·지식 허브’ 이미지를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카타르는 사우디(종교 중심지)와 UAE(물류·금융·관광 중심지)와는 구별되는 국가 이미지 구축을 위해 공을 들였다. 이 과정에서 2022년 월드컵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합 마하르메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 연구원은 “축구의 경우 워낙 대중적이고 파급력이 큰 스포츠라 문화·지식 허브를 지향하는 카타르의 국가 브랜드는 물론, 소프트파워 역량을 높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카타르는 자국 스포츠 방송 ‘비인(BeIN)’을 통해 중동권 국가들에 월드컵과 아시안컵 같은 국제대회를 중계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최근 축구를 둘러싼 중동 국가 간 경쟁과 갈등이 2022년 월드컵에서 판도 변화를 가져올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단교 사태 이후 사우디와 UAE는 “카타르월드컵은 취소돼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해왔다. 여기에 국제축구연맹(FIFA)은 2022년 월드컵 참가국을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경우 소국인 카타르에서 전체 경기를 소화하는 게 힘들어질 수 있다. 자연스럽게 주변국과 공동 개최가 추진되고, 이를 통해 단교 사태도 해결될 수 있으리란 전망이다.
그러나 현재 카타르에선 ‘공동 개최는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카타르가 공동 개최를 검토하더라도 단교 주도국인 사우디, UAE, 바레인 대신 중재국이던 쿠웨이트와 오만을 공동 개최 대상으로 고려할 것이란 주장이 나온다.
한 중동 외교가 관계자는 “젊은 왕세자가 권력 기반을 다지고 있는 사우디, 그리고 최근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쿠웨이트도 향후 축구를 국가 브랜드와 소프트파워 향상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며 “중동에서 축구를 둘러싼 경쟁은 어떤 형태로든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세형_ 현재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카타르 도하에 있는 싱크탱크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에서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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