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스타 김연아의 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 헌액식이 열린 23일 서울 올림픽파크텔 행사장에는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벽을 넘어 꿈을 이룬다는 내용의 가사가 어려움을 헤치고 정상에 오른 스포츠영웅의 기념식장에 어울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던 것은 왜일까. 박근혜 대통령의 호위무사로 불리는 새누리당의 이정현 대표가 좋아한다는 노래가 이 노래였기 때문인 걸까.
많은 이들이 김연아가 불굴의 의지로 마침내 성공하는 모습에 그들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을 것이고, 또한 김연아의 쉼 없는 노력이 결실을 맺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 자신이 살아가며 발휘해야 할 많은 노력과 의지에 대한 믿음을 키웠을 것이다. 노력과 의지로 삶의 불확실성을 통과하고 마침내 성공할 수 있다는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다른 표현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느끼게 해준 것이다. 김연아 개인의 노력과 성취가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최근 김연아가 박 대통령이 참석한 늘품체조 시연회에 가지 않아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김연아가 이날 스포츠영웅 헌액식에서 자신은 그 행사에 대해 몰랐고 불이익을 당한 적도 없다고 밝히기 전까지 많은 팬들은 분노를 쏟아냈다.
이러한 분노의 바닥에는 팬들의 희망이 투영된 상징적 인물을 정권이 부도덕한 현장에 불러내어 정치적 소도구로 이용하려 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때의 김연아는 개인적인 도전과 노력, 난관의 극복이 희망적으로 형상화된 인물인 것이다. 설령 김연아가 아니었더라도 비슷한 위상을 지닌 또 다른 스타가 이런 일을 겪었어도 같은 논란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본다.
최순실 사태를 겪고 있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노력과 성실이라는 덕목이 정당하게 꿈을 이루어줄 수 있을 것인지를 의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김연아는 거위의 꿈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실체적 존재이다. 김연아 외에도 많은 스포츠 스타들은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다. 정권으로서는 이러한 스타들의 이미지를 이용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팬들이 김연아가 정권의 그런 의도에 이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히려 좋게 평가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정권과 팬들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흙수저’도 아니고 ‘무수저’라고 자처했던 이정현 대표도 거위의 꿈을 이야기해 왔다. 지역주의 타파와 새로운 정치혁명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노래를 휴대전화 통화 연결음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위기에 몰려 있다. 그가 이끄는 새누리당과 그가 앞장서 보호하고 있는 현 정권은 오히려 수많은 거위의 꿈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지탄받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가 대다수 국민을 위하지 않고 소수의 권력 핵심만을 위하며 민심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인식을 심어 줬기 때문이다.
그가 대의를 위한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그가 말했던 거위의 꿈은 한낱 개인의 출세욕에 지나지 않았다는 후세의 평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현실의 무거운 중력을 떨치고 날아오르고 싶은 것은 김연아든 이 대표든 누구든 우리 모두의 공통된 심정이다. 그러나 날아오르고 싶다는 꿈은 같았으되 그 날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는 모두 생각이 달랐던 것일까. 조율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오늘의 이 불협화음은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누군가의 꿈이 누군가에게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누군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한 개인의 꿈이 반드시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아름다운 꿈을 표현한 노래를 들으며 느끼는 시대의 크나큰 불화와 괴리감이 쓰기만 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