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 교수는 1997년 미국 수학학회지에 풀커슨 상 수상 소식과 해당 업적을 알리는 지면과 사진을 통해 처음 만났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미국 벨연구소 재직 중 이산수학(離散數學)에서 60년간 최대의 난제로 꼽혔던 ‘램지 수에 대한 예상’을 해결해 세계 수리프로그램학회와 미국수학회가 공동으로 3년에 한 번씩 수여하는 풀커슨 상을 단독 수상했다. 이 상은 이산수학 분야 최고상이며 미국수학회가 주는 5개 분야의 주요 상 중 하나로 김 교수가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유일한 수상자인 것으로 알고 있다. 같은 해 김 교수는 40여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노르웨이 스톡홀름에 가는 상으로 불리는 ‘알프레드 슬로안 펠로’로 선정됐고 이후에도 놀라운 성과를 계속 내 세계적 석학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김 교수를 2006년 만났다. 마이크로소프트가 1997년 세운 연구소의 이론그룹 창립멤버이자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다 그해 연세대 수학과에 특별 채용된 것이다. 김 교수처럼 나 역시 연세대 물리학과를 다닌 적이 있어 자랑스러운 선배로 생각해 친근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의 귀국 소식은 국내 수학계에서 큰 화제였다. 연세대 수학과의 BK21사업단 선정 심사 때 심사위원들의 첫 번째 질문이 ‘김정한 박사가 정말로 연세대에 오는가?’였다. 그가 학자로서 누리는 세계적 위치, 30만 달러(약 3억4000만 원)가 넘는 연봉 그리고 모든 연구 활동에 대한 완벽한 지원 등의 대우를 뒤로하고 그것도 자신의 학문적 최전성기에 영구 귀국을 결심한 것에 대한 국내 학계의 놀라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가 한국 학계를 키우고자 하는 큰 꿈을 꾸지 않았다면 절대로 할 수 없었던 결단이었다.
김 교수가 연세대에 부임한 뒤 어느 날 “‘교육’이 문제가 아니고 ‘탈교육’이 문제다”라고 주장해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다. 처음으로 맡은 수업의 첫 시험 결과를 봤더니 중학생 정도의 지식수준에서 생각만 하면 풀 수 있는 문제는 거의 모든 학생이 틀린 반면 교재 내용 중 가장 어렵고 기술적으로 복잡한 부분의 문제는 풀었다면서 정해진 유형에만 강할 뿐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안타까워했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연습을 시켜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가 연세대 부임 2년이 지나 국가수리과학연구소 소장직을 제안받자 수학과 젊은 교수들과 “여러분이 반대하면 고사하겠다”며 의논을 했다. 당시 그는 국내 수학자 중 가장 많은 연구비를 9년 동안 보장받은 상태였고 연세대의 초대 언더우드 석좌교수로 최상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수학과로서도 큰 손실이고 본인 연구에도 득이 될 리 없지만 국제적으로 유명한 수학연구소에서의 경험과 높은 학문적 안목을 바탕으로 국내 수학 발전을 위해 헌신하려는 대승적 의지를 보고 좋은 일이라고 찬성했다.
돌이킬 수 없으나 그때 만류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김 교수는 2대 소장직을 수행하며 취임 당시 상가 2층 일부에 세 들어 살던 수리연을 크게 확장했으며 수학계 전체를 위한 연구소로 발전시키는 등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개인적 희생을 치렀다. 임기 말에 악의적 무고, 압수수색, 거짓투성이의 언론플레이는 물론 개인 비리가 전혀 없다는 수사 결과에도 검찰에 송치되는 등 엄청난 수모와 고초를 받고 상처도 입었다.
“5년 안에 내가 어떤 것을 발명하리라 확언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무엇인가를 연구할 것이고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일 진리를 발견한다면 그 진리는 언젠가는 유용할 것이다.”
미국수학회지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수학연구소 창립 과정과 목표 등을 소개하는 기사의 말미에 인용된 김 교수의 철학이다. 지나고 보니 이 철학은 현재 국내 연구소들의 운영 목표 및 학문 발전 모델과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그에게 자신의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당신의 앞에 어떤 삶이 기다리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무엇인가를 연구할 것이고 무언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진리를 발견할 것이고 그 진리는 반드시 유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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