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나는 자주 ‘세트’로 묶였다. 이상하게 그랬다. 이천 년대가 시작되고 엇비슷한 시기에 등단을 해서인지 어쩐지, 하여간에 세트로 거론된 것이다. 간혹 함께할 자리가 있다 해도 그녀 옆에 앉기가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뭐랄까, 사석에서도 굳이 김혜자 씨의 곁에 앉는 최불암 씨가 된 기분이 들어서였다. 더욱 난감한 것은 우리에게 따라붙는 젊은 작가들이란 수식어였다. 말이 좋아 ‘젊은’이지 뭔가 살짝 어리다는 뉘앙스의 애매하고 퀴퀴한 말이었다. 내 눈을 바라봐 난 이미 마흔이야, 항변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나는 늘 민망하고 억울했다. 열두 살 많은 아저씨와 세트가 된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런저런 억울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보다 더 잘해낼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늘 멋진 글을 써왔다. 브라보 김애란, 파이팅 김애란.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운 작가다. 아마도, 그녀의 글을 읽은 많은 이들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며 나아가 우리글을 모르는 많은 이들도 동감을 표하게 될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녀의 힘은 무엇일까? ‘{’이라는 옛말이 있다. 풀어 말하자면 헤아린다의 명사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김애란을 떠올리면 언제나 일착으로 떠오르는 단어이다. 그녀는 헤아리는 사람이다. 헤아리는 존재이고, 헤아리는 작가이다. 어리다, 젊다, 재기발랄하다 유의 개똥 같은(지겹지도 않냐?) 말보다는 고백하건대 그녀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녀는 달려왔다. 달려갈 것이며, 이 무슨,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이라니…. 하여간에 또 세트로 묶여 ‘김혜자 씨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와 같은 청탁을 나는 받아야만 했다. 파,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최불암 씨처럼 웃고 말았다.
작가라는 족속이 그렇다.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 이런 얘길 들으면 실로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이끌고 빛내고 이런 거 참 좋아하네, 누구누구를 선정하고 이런 거 참 즐기네…. 명사들의 수만 늘려가는 이 세계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 따위 말에 현혹되지 말고(그럴 리도 없겠지만), 그녀가 오롯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명사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작가로서(블링블링 또 어찌 빛나지 않을 리 없는 10년 뒤의 한국에서), 빛이 들지 않는 어둑한 구석을 찾아 헤아리고 적셔주는 작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늘 그래왔듯, 그녀는 아마도 그런 작가가 될 것이다. 감히 말해보건대 그녀 역시 100명이 빛나는(혹은 빛낼) 한국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달려라, 애란!
10년 후엔 그녀도, 그녀의 글에 등장했던 젊은이들도 40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다들 잘 살고 있습니까?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쓴 글의 주인공들에게 뒤돌아 물음을 던질 그녀를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뭉클하다. 그러기도 쉽지 않겠지만 행여 그들이 ‘우린 잘 살아, 언니 가르마나 잘 타셔’와 같은 말을 해준다면 나는 좋겠다, 정말 좋겠다. 더는 그들이 안쓰럽지 않은 순간이 온다면, 내가 살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식사를 그녀에게 대접하고픈 마음이다. 봄볕이 쏟아지는 테이블이라면 좋겠고, 넉넉한 의자가 함께라면 더욱 좋겠다. 뭘 먹고 싶어요? 내가 묻는다면 음, 음 그녀는 또 이 아저씨의 주머니 사정을 헤아리려 들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 말이다. 그 친구는 여전히 잘 웃죠? 근사한 얼굴로 정말 근사히 웃을 줄 알던 부군의 안부를 나는 물을 것이고, 그러고 보니 또… 언제고 태어날 그녀의 아이는 몇 살이 되어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현실이 될 수 있을 때까지 달리자, 애란. 달려라, 애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