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과 관습! 글자의 순서를 바꿨을 뿐인데 의미는 꽤 다르다. 습관이 개인적이라면 관습은 사회적이다. 습관이 내적(內的)으로 생성된다면 관습은 외적(外的)으로 부여된다.
이자람(34)! 그에게 습관은 있다. 반면 관습은 없다. 습관이 스타일이라면 관습은 시스템이다. 기존의 국악계에선 판소리와 창극이라는 시스템을 무척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전통예술이 그렇다지만 도제(徒弟) 제도 아래서 발전한 판소리는 유독 더하다. 스타일은 결국 시스템 안에 존재한다. 거의 대부분의 소리꾼은 이런 길을 걸었다.
이자람은 달랐다. 자신의 스타일을 중시했다. 기존의 시스템은 거부했다. 이자람이 유별난 이유가, 이자람이 특출한 근거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판소리는 도제라는 엄격한 제도 사이에 존재한다. 전통예술이 보통 그럴진대 판소리는 더하다. 스승과 제자의 계보가 어느 분야보다 엄격하다. 상명하달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서로 다른 계보의 사람과는 말조차 섞는 일이 조심스러웠던 시대가 있었다. 스승의 눈 밖에 나기가 두려워서다.
2000년대 초반 ‘타루’를 기억하는가? 이런 틀을 과감하게 떨친 그룹이었다. 판소리를 하는 동년배끼리, 유파나 스승이나 학교를 불문하고 판소리라는 이름으로 뭉쳐 보자는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극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게 요즘 말하는 판소리뮤지컬이라고 부르는 타루의 출발이었다. 그 중심에 이자람이 있었다.
시스템이 달라지니 스타일이 달라졌다. 기존에도 창작판소리와 창작창극이 있었으나 그들이 접근하는 방식은 달랐다. 10여 년 전 타루 시절 이자람의 대표작은 창작판소리 ‘구지가’였다. ‘구지’는 ‘지구’를 뒤바꾼 이름이다. 모든 면에서 지구와 정반대인 ‘구지’란 별을 설정해놓고 이를 통해서 지구의 여러 관습의 부조리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수작이다. 그 밑에는 양성평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이 깔려 있다.
이자람은 자신의 이름처럼 ‘자람’을 지향하는 것 같다. 어느 날 이자람은 자신이 주도적이었던 ‘타루’를 나온다.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타루에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하지만 그는 타루라는 시스템을 과감하게 버리고 또 다른 시스템을 구축한다. 그게 바로 판소리 만들기 ‘자’였다.
21세기의 ‘이자람(작창)-남인우(연출)’는 판소리와 창극의 발전을 이끌어온 계보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판소리 브레히트’를 보면 참 재밌는 현상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이자람이라는 소리꾼이 가진 스타일이 최대한 살아 있다. 반면 작품의 제작에서 유통까지 모든 면에서 기존의 판소리와 창극의 시스템과는 산뜻하게 결별한다. 이자람의 스타일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판소리(음악극)의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자람의 스타일이란 무엇일까? 판소리의 3요소를 소리 아니리 발림이라고 한다. 뮤지컬과 비교하자면 소리는 노래요, 아니리는 대사요, 발림은 연기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판소리와 창극은 소리를 특히 강조했다. 그 결과 판소리가 음악적으로는 발전했으나 연극이나 공연예술로는 분명 취약했다. 이자람은 여기서 벗어났다. 그는 기존의 판소리를 최대한 존중했다. 반면 아니리는 그렇지 않았다. 이야기 자체와 전달방식에서 많은 사람과 소통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한 거다. 더불어 발림은 판소리와 연극 사이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소리 아니리 발림이 각각 정(正) 반(反) 합(合)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천가’와 같은 작품이 탄생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판소리의 역사에서, 춘향 심청에만 친숙했던 우리가 이제 ‘사천가’를 통해서 ‘순덕’을 또 다른 판소리 속의 인물, 우리 역사와 문화 속의 여성으로 만나게 됐다. 이런 이자람이 또 어떻게 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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