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음성 꽃동네가 국내 최대의 사회복지시설로 성장하기까지에는 많은 이들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꽃동네 오웅진 신부는 꽃동네 회지(會誌)의 ‘7월에 드리는 편지’를 통해 지금의 꽃동네를 만든 ‘영웅’들을 소개했다.
첫 번째 영웅은 고 최귀동 할아버지(?∼1990). 최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당시 음성군 금왕읍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강제징용 됐다가 병든 몸으로 고향에 돌아와 무극천 다리 밑에서 걸인생활을 했다. 자신도 불편한 몸이지만 밥 동냥을 해 병든 걸인들을 먹여 살렸다. 1976년 금왕읍 무극천주교회 주임신부로 발령받은 오 신부는 최 할아버지를 만나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고 당시 가지고 있던 돈 1300원으로 무극리 용담산 기슭에 방 다섯 칸짜리 ‘사랑의 집’을 지어 이들을 입주시켰다. 이곳이 현재의 꽃동네 시초였다. ‘작은 예수’ ‘거지 성자’로 불린 최 할아버지는 1986년 2월 한국가톨릭대상을 받았다.
고 강국남 할아버지(?∼1991)는 ‘반공 포로’ 출신으로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로 어렵게 생활했다. 그는 주민들이 먹을 것을 주면 그 집 앞 청소를 하는 등 반드시 보답을 해 후원자 단체인 ‘꽃동네 모임’의 시초가 됐다. 홍승옥 할아버지(75)는 시각장애인이면서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15년 동안 구걸해 모은 돈 100만 원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며 꽃동네에 기탁했다. 이를 계기로 12억 원의 돈이 모여 노숙인 생활시설인 ‘요한의 집’을 짓게 됐다.
오 신부는 1984년 12월 26일에 꽃동네를 찾아온 평신도 부부도 영웅으로 꼽았다. 한사코 신분 밝히기를 사양했다는 이 부부는 33년간 폐지를 팔아 모은 돈 983만 원을 자선사업에 써 달라며 맡기고 갔다. 이 돈은 심신장애인 요양원 건설의 밑거름이 됐다.
김인자 할머니(74)는 양손을 전혀 쓰지 못해 두 발로 식사를 하고, 발가락으로 십자수를 놓거나 종이학을 접는 중중장애인. 그는 자신보다 더 몸이 불편한 전신마비 환자(배영희 씨)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돌봤다. 김 할머니는 “인내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다. 장애인들에게 무관심하지 말자”라는 자신의 생각을 실천했다. 이 같은 고귀한 정신은 ‘꽃동네 장애인 학교’를 설립하게 만들었다. 오 신부는 “이분들 말고도 수많은 영웅이 꽃동네를 있게 만들었다. 꽃동네를 사랑하는 회원 모두가 영웅”이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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