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둘, 셋∼큐!” 드라마 연출자의 사인이 내려지자 세트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발소리,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때 등장한 남녀 주연 배우. 어깨를 맞대고 앉아 눈빛을 교환한다. 거사를 앞둔 낭군님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에는 애틋함이 묻어난다. 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오가는 대화. 한 편의 시처럼 애절하면서도 마음을 적시는 대사에 배우는 물론이고 주변 스태프의 눈시울까지 붉어졌다.그 순간 정적을 깨는 한마디. “컷!” 한층 무르익던 분위기가 주변 호수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진 이 한마디에 확 깨졌다. 연출자는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구 거야, 저 그림자?” 이 말을 들은 기자, 순간 움찔했다. ‘아, 내가 좀 오버했구나.’ 의욕이 앞서 배우에게 너무 접근한 게 문제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 죄인이 된 양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 ○ 옷차림부터 NG
지난달 28일 오전 충북 제천 KBS드라마 세트장. 깊은 산속 아름다운 충주호를 배경으로 조선 시대를 재현한 세트장은 열기로 후끈거렸다. 다음 주 종영을 앞둔 KBS드라마 ‘공주의 남자’ 막바지 촬영 때문이었다. 수양대군의 딸 세령(문채원)과 김종서의 아들 승유(박시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공주의 남자’는 시청률 20%를 상회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기자는 관계자를 제외하고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세트장을 방문했다. 하지만 기자 신분이 아닌, 현장매니저(로드매니저)란 직함으로였다.
연예인 매니저는 최근 ‘뜨는’ 직업이다. 매니저 생활을 동경하는 젊은이들이 한 해 수백 명씩 문을 두드린다. 수요가 늘면서 ‘연예인 관리사’란 민간 자격증 도입까지 검토되는 상황. 이렇게 주가가 높은 매니저란 직업의 속을 들여다보고, 화려해 보이는 생활의 실체를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자청했다. ‘공주의 남자’ 주연배우 박시후의 일일 현장매니저 역할을.
현장을 찾기 하루 전. 박시후가 소속된 이야기엔터테인먼트 장철한 실장으로부터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속으로 생각했다. ‘배우 옆에만 있어주면 되지 복잡할 게 뭐 있나.’
하지만 그런 생각은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산산이 깨져버렸다. 만나자마다 장 실장이 한 마디 쏘아붙였다. “옷차림(후드티+반바지)이 문제네요.” 그가 말을 이었다. “일주일 동안 집에 못 들어가도 옷차림은 단정해야 해요. 당연히 반바지나 트레이닝복은 피해야겠죠? 옷차림이 단정해야 일에 대한 긴장감도 유지할 수 있어요.” 지적을 듣고 보니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덥지도 않은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같은 소속사의 김수용 현장매니저는 간단하게 현장분위기를 설명한 뒤 ‘일일촬영계획표’를 건넸다. 계획표는 복잡했다. 신 넘버, 촬영시간, 촬영장소, 등장인물, 소품 등이 상형문자 같은 기호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보통 이런 계획표가 나오는 시간은 촬영 전날 밤. 당일 아침에 나올 때도 빈번하다고 한다. 김 매니저는 “방송사로부터 계획표를 건네받는 순간 번개처럼 자기 배우 부분을 체크하고 내용을 숙지해야 한다”고 했다. 또 “촬영 전 의상과 메이크업 등을 준비하는 1시간 동안 배우에게 계획표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고, 배우의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방송사와 협의해 계획표를 수정하는 것도 매니저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 ‘셀카’도 잘 찍어야 된다고?
기자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박시후는 이틀 밤샘 촬영 뒤 사흘 째 촬영 중이라고 했다. 이날 박시후가 들어가는 신만 18개. 보통 한 신을 찍는 데 약 1시간이 걸린다고 가정하면 하루 종일 촬영장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장 실장은 “그래도 제천에서만 촬영이 진행되는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수원, 문경, 영주, 안동, 강릉, 태안 등 거의 전국을 누비며 촬영이 진행되다 보니 하루에 3곳 이상 이동할 때도 많다는 설명이다. 장 실장은 “오늘만 해도 오전 4시 반에 문경에서 촬영이 끝나 대충 샤워만 하고 이곳 제천으로 이동했어요. 그러고 오전 7시부터 지금까지 촬영 중이죠”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배우와 인사를 나눈 뒤 본격적으로 현장에 투입됐다. 가장 기본적인 건 역시 배우에 대한 모니터. 대사 하나, 동작 하나까지 꼼꼼히 체크해 배우에게 전달했다. 촬영 중간 배우의 긴장을 풀어주고 생수를 가져다주는 등 ‘24시간 대기조’ 역할도 역시 현장매니저의 몫. 방송사 스태프를 도와 일반인 출입을 제한하는 등 촬영장 분위기를 정돈하는 임무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최근 연예인들이 온라인 팬 카페와 미니홈피, 트위터 등에 사진을 많이 올리게 되면서 사진을 ‘잘’ 찍는 것도 중요 임무가 됐다. 기자도 배우 옆에서 수차례 셔터를 눌러봤다. 하지만 ‘건질 만한’ 결과물이 없었다. 이때 옆에서 능숙하게 셔터를 누르던 김 매니저의 한마디. “‘셀프카메라의 3대 요소’를 기억하면 돼요. 드라마에서 볼 수 없는 배우의 색다른 모습, 촬영장 분위기, 배우의 표정을 모두 담아내야 한다는 얘기죠.”
○ 거절에도 노하우가 있다
이날 장 실장의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담당 연예인만 따라다니는 현장매니저와 달리 매니저 경력 8년 차인 장 실장은 소속사 연기자 16명의 일정, 섭외 등을 모두 관리한다. 장 실장은 “특히 최근 인기 상한가인 박시후의 경우 작품 및 광고·행사 섭외, 인터뷰 요청 등과 관련한 전화만 하루에 수십 통 이상 온다”고 전했다.
전화를 받으면 일단 배우의 이미지, 일정 등을 1차로 고려한다. 그리고 적절하다는 판단이 나오면 기획안을 메일로 받은 뒤 배우 및 소속사와 협의해 수락할지 결정한다. 기자는 장 실장을 대신해 몇 통의 전화를 받아봤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일본 모 방송사의 인터뷰 요청. 장 실장에게 확인한 결과 이미 잡혀 있는 다른 일정과 겹쳤다. 나름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힘이 드는 게 사실. 이를 본 장 실장은 “거절하는 것도 요령이 있다”며 웃었다. 일단 다른 스케줄 핑계를 대는 게 기본이고, 배우의 장기적인 계획 등을 상세하게 설명한 뒤 정중하게 다음을 기약하는 게 2단계 방법이라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지인의 부탁은 정말 거절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매니저의 수입은 얼마나 될까. 보통 현장매니저는 월급이 50만 원 안팎, 실장급으로 올라서면 200만∼300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장 실장은 지금 월급이 매니저 길에 들어서기 전 다니던 직장에서 받던 월급보다 적다.
김 매니저는 “그나마 받는 50만 원도 시간이 없어 10만 원도 못 쓴다”며 웃었다. 이러다 보니 처음 매니저 직업을 택한 10명 가운데 9명은 1주일도 못 버티고 손을 든다.
그런데 왜 매니저를 할까. 장 실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자유롭잖아요. 큰 조직의 부속물이란 느낌도 없고. 하기에 따라 조직의 머리가 될 가능성이 있단 것도 매력이죠.”
정신없이 일정을 소화하다보니 어느덧 오후 6시 반.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촬영장엔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다. 낮 촬영분 가운데 마지막 신을 아직 소화하지 못해서다. 마지막 신은 복수를 앞둔 승유와 그를 바라보는 세령의 가슴 아픈 이별 장면. 감정 몰입이 중요한 장면인 데다 유독 대사도 많았다. 이전 촬영 내내 잘 나오지 않던 NG가 거듭됐다. “빨리 빨리”란 스태프의 목소리에선 다급함이 묻어났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자의 뱃속에선 ‘꼬르륵’ 난리가 났다. 마침내 해가 지기 직전 연출자의 입에서 떨어진 고대하던 한마디. “오케이.”
낮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일까, 이제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기쁨일까. ‘초짜 매니저’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 박시후 “무명 때부터 지켜준 매니저… 가족같은 존재” ▼
먹을 복이 있었다. 마침 박시후의 공식 팬클럽인 ‘시후랑’이 촬영장 인근 고깃집을 예약해 둔 덕분이었다. 배우와 소속사 관계자, 촬영 스태프 등 80여 명이 한우고기로 배를 채웠다. 그런데 식당에서도 매니저는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음식 주문, 스태프 챙기기, 각종 정보 교환, 팬클럽 회원들과의 가교 역할까지. 그렇게 기다리던 냉면을 먹을 때쯤엔 면이 탱탱 불어 있었다.
장 실장은 “그래도 배우를 잘 만나 다행”이라며 웃었다. 박시후는 성격이 밝고 배려심이 많아 매니저도 편하다는 설명.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 박시후에게 “당신에게 매니저란 어떤 존재냐”고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가족”이었다. “제가 이름 없는 배우일 때도 항상 곁을 지켜줬던 사람이 매니저거든요.”
쌀쌀해진 날씨 속에서 야간촬영이 이어졌다. 오후 10시쯤 되자 다리가 풀리고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래서 장 실장에게 말했다. 다음 날 취재 일정도 있고 해서 먼저 가야겠다고.
“아니, 이제 시작인데 어디 가세요. 새벽 4시쯤이면 끝날 듯한데 저희랑 같이 올라가시죠.”
그 말을 들으니 아찔했다. 결국 “체력은 문제없는데 촬영장에서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안 되겠다”는 뻔한 핑계를 대고 도망치듯 현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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