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현장체험]일일 남성 웨딩플래너 실습해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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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 남성 웨딩플래너 실습해보니…
가장 힘든 고객은 까칠한 사람 아닌, 결정 못하는 사람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평가는 냉정하고 꼼꼼했다. 13년 경력의 웨딩플래너 윤성문 이사(오른쪽)가 웨딩드레스 숍에서 신부 이경진 씨(왼쪽에서 두 번째)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윤이사의 옆에 있는 사람이 웨딩플래너 체험에 나선 본보 신진우 기자, 왼쪽은 드레스 숍의 김혜경 실장이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평가는 냉정하고 꼼꼼했다. 13년 경력의 웨딩플래너 윤성문 이사(오른쪽)가 웨딩드레스 숍에서 신부 이경진 씨(왼쪽에서 두 번째)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윤이사의 옆에 있는 사람이 웨딩플래너 체험에 나선 본보 신진우 기자, 왼쪽은 드레스 숍의 김혜경 실장이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웨딩드레스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드레스들은 경쟁하듯 순백색을 뽐내는데 눈앞은 캄캄해졌다. 어색한 장소, 낯선 사람, 그리고 경직된 분위기.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했더니 그때서야 여유가 좀 생겼다. 천천히 ‘피팅룸’ 안을 둘러봤다. 그러다 ‘그분’과 눈이 딱 마주쳤다. 바로 신부의 어머니. 다시 심장이 벌렁거렸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어색한 침묵.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기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1초가 1분 같은 어색한 시간. 어쩔 줄 모르며 우물쭈물 서있는데 옆에 있던 ‘사부’가 빙긋 웃더니 한마디 했다. “어떠세요. 이론과 실전이 좀 다르긴 하죠?”

○ 믿음직하고 힘도 좋다

예비부부의 70% 이상이 결혼에 앞서 이들을 찾는다. 정년이 없는 데다 경력이 쌓일수록 우대받는다. 최근엔 대학에 관련 학과까지 생길 만큼 촉망받는 전문직이다. 월수입은 100만 원 미만에서부터 1000만 원을 넘을 만큼 능력과 경력에 따라 천차만별.

웨딩플래너 얘기다. 이들은 예비부부를 대신해 결혼과 관련한 모든 일을 진행해 준다. 결혼 정보나 비용을 제시해 주고, 예식장 예약, 드레스 및 메이크업 준비, 혼수품 구입 등까지 돕는다. 이른바 결혼 컨설턴트인 셈이다.

웨딩플래너란 직업은 여성들의 ‘성역’이었다. 결혼 준비가 보통 신부를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그랬다. 그런데 최근 남성 웨딩플래너가 부쩍 늘었다. 아직 전체의 1%도 안 되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만만치 않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남자도 웨딩플래너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에 32세 미혼 남성인 기자가 직접 웨딩플래너 체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16일 오전, 본격적인 체험에 앞서 멘토 역할을 해줄 웨딩플래너와 미팅을 가졌다. 기자의 사부는 경력 13년의 윤성문 ‘베리굿웨딩’ 이사. 그는 그동안 1000쌍이 넘는 커플을 맡아 결혼을 도와줬다. 남성 웨딩플래너 세계에선 1세대이자 ‘살아있는 전설’인 셈.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베리굿웨딩 사옥 2층에서 만난 그는 편안하지만 왠지 꼼꼼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윤 이사는 기자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그의 환한 웃음에 긴장감을 놓는 순간 바로 지적이 날아왔다. “일단 복장이 조금 불량하네요.”

나름 푸른색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까지 깔끔하게 챙겨 입었는데 복장이 불량하다고? 머리를 긁적이며 이유를 물었더니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밝은 색의 옷은 피하는 게 좋아요. 주인공이 신랑, 신부인데 같이 다니는 플래너가 너무 튀면 문제죠. 또 재킷을 갖춰 깔끔하게 입는 게 좋아요. 부담스러울 만큼 무겁게 입는 건 금물이지만요.”

같은 회사 원정욱 대표(웨딩플래너 경력 12년)는 웨딩 촬영 때 보타이 등 신랑 소품을 다양하게 들고 다닌다. “웨딩 패션은 상대적으로 신부 위주이다 보니 신랑이 소외감을 느낄 수 있어요. 신랑을 위해 하나라도 정성스레 챙겨주면 그게 곧 남성 웨딩플래너의 경쟁력으로 돌아옵니다.”

남성은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덜 꼼꼼한 편이다. 이런 부분이 웨딩플래너 일을 하는 데 제약이 되진 않을까. 윤 이사는 단호하게 “노(No)”라고 외쳤다. “큰 틀에서 결혼 그림을 짜고 그 과정을 치밀하게 진행하는 부분에선 남성의 경쟁력이 더 높다고 봅니다. ‘신뢰’라는 키워드에서도 남성 웨딩플래너가 더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어요.”

체력과 힘도 윤 이사가 꼽은 남성 웨딩플래너의 강점. 결혼 준비 과정엔 항상 ‘무거운 짐’이 따른다. 결혼식 당일에 예비부부가 식장으로 이동할 때 들고 다니는 가방만 4∼6개일 정도. 힘 좋은 남성 웨딩플래너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 능숙하게, 또 솔직하게

3시간가량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드디어 현장으로 이동할 시간. 기자는 일단 강남구 청담동의 웨딩드레스 숍으로 갔다. 한 예비부부가 웨딩 촬영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 데 조언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이동하면서 윤 이사는 고객을 상대할 때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표정은 밝게, 목소리 톤은 조금 높게, 말은 자신감 있게…. 일단 이 세 가지만 기억하세요.”

숍에 도착해 피팅룸으로 올라가니 신부는 한창 드레스 입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와본 드레스 숍. 그곳에서 신부의 어머니와 마주 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윤 이사는 너무나 능숙했다. 이날 신부가 입어본 드레스만 9개. 이 가운데 종류별로 3개를 고르는 과정에서 그의 평가는 패션 전문가를 뺨칠 정도였다. 신부의 얼굴, 체형, 패션 트렌드 등을 고려해 전문적인 조언을 쏟아냈다. 특히 기자를 놀라게 한 건 그의 솔직함. “드레스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등 솔직한 평가를 거침없이 내렸다. 그래도 신부이기에 앞서 고객인데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보통 결혼 준비와 관련된 문제는 가까운 친구에게도 솔직하게 말하기 힘들죠. 이럴 때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상대가 웨딩플래너입니다. 웨딩플래너가 먼저 솔직하게 다가가야 고객도 솔직히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웨딩플래너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거죠.”

신부 이경진 씨(29)는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신부의 어머니인 문성진 씨 역시 편한 성격의 소유자. 덕분에 30분쯤 지나니 기자도 긴장이 풀렸다. 드레스에 대한 ‘어설픈’ 평가를 내리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까지 하면서 나름 밥값을 했다. 윤 이사는 “이런 고객을 만나면 웨딩플래너로선 행운”이라며 웃었다. 그렇다면 가장 만나기 싫은 스타일의 고객은 누구일까. 의외로 까칠하고 비판적인 성격은 두 번째였다. 최악은 우유부단한 고객이라고 했다.

2시간에 걸쳐 드레스를 고른 뒤 바로 인근 메이크업 숍으로 이동했다. 웨딩플래너가 여성의 전유물이란 고정관념 때문일까. 괜히 주변 시선을 의식하게 됐다. 반면 윤 이사는 그런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남성 웨딩플래너. 희소성이 있잖아요. 뭔가 개척한다는 사명감도 생기고. 저도 남자라서 스트레스 받은 적이 있긴 했죠.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무렵 제가 너무 젊다 보니 신랑들이 경계해서 웨딩플래너를 바꿔달라고 했을 때였어요, 하하.”

기자는 메이크업 숍에서 1시간 넘게 신부가 상담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꼼꼼하게 중요 사항을 기록했다. 그런 뒤 전화로 다른 고객의 기초 상담까지 하고 나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더니 윤 이사가 한마디 했다. “피곤하시죠? 그래도 오늘은 한가한 날인데….”

실제 웨딩플래너의 ‘진정한 하루’는 주말에 시작된다. 결혼식이 주말에 몰리다 보니 아침 일찍부터 정신없이 바쁘다. 결혼 시즌엔 하루에 고객 6, 7쌍의 결혼식이 몰릴 때도 있단다. 쉬는 날 역시 일정치 않다. 쉬는 날이라도 고객이 상담을 원하면 응해야 하고, 예정된 계획이 쉬는 날로 미뤄지면 또 못 쉰다. 실제로 이날 드레스 숍에서 턱시도를 입기로 한 신랑이 일 때문에 오지 못해 다음 날로 약속을 미룬 일이 생겼다. 다음 날엔 쉴 생각이었던 윤 이사의 계획도 어긋났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 직업이 좋을까. 윤 이사가 말했다. “한 가족의 4남매 결혼 준비를 제가 다 진행한 적이 있어요. 그분들과 계속 가깝게 지내다 보니 그중 한 분의 자녀 돌잔치에까지 가게 됐죠. 그런데 안면이 있는 사람이 하객의 절반이 넘더군요. 그분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정말 좋았고요. 그냥 제가 결혼을 도와준 커플들과 그 가족이 잘 사는 모습을 보면 흐뭇해요. 이 직업 택하길 참 잘했단 생각이 들죠.”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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