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서울 종로구 서촌 상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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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7일 03시 00분


상량이오, 높은 곳에서 식구를 지켜주소서

서울 종로구 서촌(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일컬음)에서 상량식(上樑式)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광화문이나 숭례문 같은 국가적인 건물의 상량식은 접해 본 적이 있지만, 여염집의 상량식은 처음이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상량식이란 한옥의 마룻대(상량)를 제자리에 위치시키는 의식이다. 마룻대는 서까래를 거는 도리 중에서도 가장 위에 있는 종도리를 말한다. 한옥의 가장 높은 곳(마루는 꼭대기의 순우리말)에 걸린다. 예부터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종도리를 올리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건물 골격의 완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도리를 올리는 날이면 공사를 멈추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다. 새 집에 재난이 없도록 지신(地神)과 택신(宅神)에게 빌고, 목수들에게 감사와 더불어 당부의 뜻도 전했다.

상량에는 집의 내력이나 공사에 참여한 사람의 명단을 보관한다. 이곳에서는 가끔 뜻하지 않은 물건이 발견되기도 한다. 봉정사 극락전에서는 1972년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건물의 중수 시기가 새로 확인됐다. 이 덕에 극락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 흥겨운 상량식 한마당

서촌으로 가는 날 가을 날씨는 더없이 상쾌했다. 서촌은 미로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가득한 곳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 중 하나라는 체부동 골목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벌써부터 북적였다. 가뜩이나 좁은 골목길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윽고 마을을 한 바퀴 돈 길놀이패가 집 앞에 당도했다. 길잡이가 걸쭉한 목소리로 “복 들어간다”고 외쳤다. 이어지는 지신밟기. 풍물패들이 소리와 함께 집터의 곳곳을 밟아댔다. 집 안 곳곳에 자리 잡고 앉은 지신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잡색(놀이의 흥을 돋우려고 따르는 광대) 하나는 연신 우스꽝스러운 춤으로 분위기를 돋웠다.

액막이 타령이 이어진 뒤 본격적인 상량식이 진행됐다. 집주인이 한지에 적은 상량문을 낭독했다. 이윽고 상량문을 고이 접어 마룻대의 홈에 집어넣고 썩지 않도록 들기름을 발랐다. 고사를 지낼 때 쓴 술은 각 기둥에 조금씩 나누어 뿌렸다. 사방에 있는 귀신을 배려한 것이다.

드디어 마룻대가 올라갈 차례다. 집주인이 “상량이오”라며 크게 세 번 외치자 마룻대를 묶은 광목이 팽팽해지며 들썩이는가 싶더니 성큼성큼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마룻대가 쭈르륵 미끄러져 원위치로 내려왔다. 목수들이 정성(돈)이 부족하다며 장난을 놓은 것이다. 실랑이가 벌어지고 마룻대가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사람들의 탄성과 웃음이 새어 나온다. 결국 집주인이 지갑을 텅텅 비우고, 여러 사람의 묵직한 현금 공세가 이어진 뒤에야 돈을 잔뜩 꽂은 마룻대가 다시 올라갔다. 나무망치를 든 목수가 몇 번 마룻대를 내려치자 제자리에 견고하게 맞물려 들어갔다. 이제 마룻대는 집의 내력을 안은 채 가장 높은 곳에서 식구들을 내려다보며 집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다.

○ 풍물패가 소음 되는 세상

상량식이 끝나자 집주인이 찾아온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줬다. 아파트가 즐비한 오늘날 대도시에서 이런 아날로그적인 옛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서촌에서 느낄 수 있는 풋풋한 사람 냄새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경찰차 한 대가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차가 멈추고 경찰관 두 명이 차에서 내렸다. 경찰은 풍물패 소리 때문에 민원이 들어왔다고 했다. 현실은 보기 좋게 내 꿈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철골 뼈대와 콘크리트 벽으로 무장한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상량식이 들어설 공간은 없었다. 좋은 학군, 지하철역 가까운 집이 대청마루의 정취를 앞서는 이상 우리의 전통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런 풍습들은 먼 훗날에는 사극에서나 접할지도 모르겠다.

상량식을 뒤로하고 잠시 체부동의 골목길을 걸었다. 한층 높아진 가을 하늘이 한옥 처마 위로 눈부셨다. 문득 어느 담 너머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나른한 오후, 이 소리마저 소음이라며 신고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투박하고 성긴 연주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도움말=황인범 대목장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서촌 상량식#스케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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