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겨울, 나는 경기도 안산에 있었다. 아직 인간이 덜 된 한 마리(?) 수습기자 시절이었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잡혀 안산 땅 곳곳이 파헤쳐지고 유골이 나오던 때였다. 기자들은 땅 대신 강호순의 주변을 파헤쳤다. 직업, 가족관계, 경제력, 성격, 고향, 모든 것이 기사거리였다. 내가 접촉한 사람들 중에는 강호순의 동생이 있었다. “형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반성했으면….” 전화기 너머 음성은 혼이 나간 채였다. 그 음성은 기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강호순의 두 아들은 어떻게 됐을까. 동생은 뭘 하고 있을까.
내가 감히 2011년 최고의 일본드라마로 꼽는 ‘그래도 살아간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그 이후를 그린다. 주인공 후카미가 중학생 시절, 여동생 아키가 살해당한다.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급생 친구 후미야가 바로 범인이었다. 그리고 15년이 흐른다.
후카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어린 여동생 또는 딸이 죽어가는 동안 아무것도 몰랐다는 죄책감은 각자의 삶을 짓누른다. 어느 날 후카미가 일하는 산속 호숫가 낚시터로 한 젊은 여성이 찾아온다. 이름은 후타바. 아키를 살해한 후미야의 여동생이다. 가해자 가족에게도 상처는 있다. 다정했던 오빠는 별안간 살인범이 됐다. 아버지는 부모로서 아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들을 피한다. 여러 차례 이사를 했지만 사건은 곧 주변에 알려지고, 그때마다 가족은 도망쳐야 한다.
범인 역시 삶을 삶답게 살지 못한다. 후미야는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다. 사람의 생명이 가치 없다고 느끼는 그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다. 제목 ‘그래도 살아간다’는 후미야에겐 ‘그런데도 살아간다’로 읽힌다. 출소한 뒤 과수원에서 일하던 그는 결국 또다시 살인을 저지른다.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있지만 드라마는 보편과 맞닿아 있다. 누구에게나 과거의 상처는 존재한다. 그 상처가 남긴 트라우마에 잠겨 허우적대본 기억, 누구나 있지 않은가. 드라마는 그런 상처받은 이들이 과거를 직면하는 순간을 잔인하리만큼 선명하게 보여준다. 내심 오빠가 범인이 아닐 거라 믿었던 여동생은 오빠의 또 다른 범죄를 짊어진다. 아들을 이해할 수 없던 아버지는 범행의 근원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딸을 잃은 엄마는 가해자 가족 역시 또 다른 피해자라는 것을 이해하고 만다. 여동생을 잃은 슬픔에 괴로워하던 오빠는 결국 범인을 용서한다.
드라마 말미에 나오는 대사는 그래서 아름답다.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울며 살아가는 거다’라는 소박한 진리는 지독하게 어두운 터널을 지나 빛을 마주보고 선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사가 아니었을까. 더욱 아름다운 건 그 터널 안을 걸어갈 희망을 주는 것이 바로 내 옆의 누군가라는 점이다. 드라마에서 후카미는 후타바에게 이렇게 말한다.
“희망이란 건 누군가를 생각할 때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를 보고 싶어질 때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 눈부신 아침 해를 보며, 당신의 오늘 하루를 생각합니다.”
s9689478585@gmail.com 수세미 동아일보 기자. 이런 자기소개서는 왠지 민망해서 두드러기 돋는 1인. 취향의 정글 속에서 원초적 즐거움에 기준을 둔 동물적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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