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살인의 추억’ 》 “네가 정말 아니란 말이야? 내 눈 똑바로 봐. 똑바로 보라니까… ×발 모르겠다. 밥은 먹고 다니냐?”
모름지기 영화와 연극 대사는 관객의 귀에 착착 달라붙게 맛깔스러워야 한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힘이 있어야 하며, 순간순간 인물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화의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관객에게 어떤 깨달음까지 준다면 불후의 명대사가 된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용의자 박현규(박해일)에게 하는 “밥은 먹고 다니냐”란 대사는 그런 조건을 다 갖춘, 한국 영화 최고의 명대사가 아닐까 한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보통 터널 장면이 나올 때까지) 현규가 범인인지 아닌지에 온 관심을 집중한다. 현규는 연쇄살인범을 잡고자 하는 영화 속 형사들과 관객 모두에게,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괴물’이다. 그는 똑똑하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강인하다. 더군다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욕망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타자(他者)적 성격 때문에 더 무서운 존재다.
연약한 여성이 기괴하고 끔찍하게 괴롭힘을 당하다 죽임을 당한 현장 앞에서 우리 모두는 좌절한다. 그리고 서서히 “우리를 엿 먹이고도 남을 놈”이라느니 “미친 ××에요” “네가 사람이야?”라는 서태윤 형사(김상경)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무력감이 분노로 바뀔 때, 태윤은 “너 같은 ×× 여기서 죽인다고 아무도 신경 안 써”라며 현규를 구타한다. 원래 태윤은 차근차근 이성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는 ‘서울 경찰’이다. 모든 것을 ‘감’으로만 해결하려는 두만과 갈등을 빚는 인물이다. 그런 태윤을 집어삼킨 분노와 폭력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의가 실현되길 바라는 마음, 악인을 벌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괴물을 쫓다 괴물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모두 끔찍한 범죄,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머리끝이 곤두서는 강한 분노를 느낀다. 우리가 그렇게 ‘단순하게 착한’ 존재라는 건 축복이자 저주다. 그런 단순한 정의감이 차고 넘칠 때 커다란 악이 잉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의감이 복수심으로 변질될 때 그렇다. 공중도덕을 안 지킨 여성의 신상을 털어서라도 벌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퍼진다. 너무 끔찍한 범죄가 벌어지면 ‘그런 악인에게도 변호사가 필요하냐’며 피의자의 변호사에게도 돌을 던진다. 하지만 ‘반인륜범죄는 소급 처벌이 가능하게 하자’ 따위의 주장이 공론의 장에 오를 때, 비이성과 파시즘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영화의 터널 장면은 볼수록 절묘하다.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질문을 듣고 우리는 비로소 현규 역시 피해자일 수도 있음을, 그가 제대로 밥도 못 먹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창조한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영화의 뒷부분 절반을 머리 속에서 다시 구성하게 되며, ‘살인의 추억’은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선다.
밥을 먹고 다니는지 물어본 뒤 두만이 하는 말은 “가, 가. 이 ×발놈아”다. 그는 현규를 놓아줘서, 체념하고 포기함으로써 괴물이 되는 것을 면한다. 에필로그인 2003년 장면에서 두만은 범인과 간발의 차이로 엇갈렸다는 사실에 눈물을 보일 정도로 사건에 대해 여전히 강한 미련을 갖고 있다. 그래도 부인과 자녀를 두고 그럭저럭, 평범하게 산다.
달아나는 현규를 향해 뒤에서 총을 쏘는 태윤은 그러지 못한다. 태윤은 에필로그에 등장하지 않고, 그런 그의 부재(不在)는 몹시 불길하다. 그는 끔찍한 괴물이 되었거나 완전히 파멸했을지도 모른다.
기묘한 함정이다. 논리적일수록, 정의감이 강할수록 “모르겠다, 가”라며 체념하기가 어려우니까. 아마 구원은 아무리 미운 상대라도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는지 관심을 갖는 데 있을 것 같다. 그런 인간애만이 우리를 겨우 구해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 다들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자. “밥 먹었어요?” “식사 하셨습니까?”라고. 고운 사람에게나 미운 사람에게나.
tesomiom 동아일보 산업부 기자. 기사도 쓰고 소설도 쓴다. 장편소설 ‘표백’으로 2011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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