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포기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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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7일 03시 00분


《 “아무리 괴로워도, 죽음보다 더 괴로울지라도, 단지 살아줘”

-‘유성의 인연’(일본 TBS·2008)
악몽은 그날도 반복됐다.

올해 4월 11일 오후 8시 무렵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뇌병변 1급 장애를 지닌 언니의 머리채를 붙잡고 화장실 타일 벽에 찧어댔다. 쿵쿵쿵…. 몇 번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놀란 어머니가 달려와 아버지를 말렸다. 타일공인 아버지는 아침부터 잔뜩 술에 취한 상태였다. 무척 화가 나 있었다. 3일 동안 일을 했지만 돈은 받지 못했다고 했다.

거실로 나온 아버지는 네 남매에게 무릎을 꿇고 앉게 했다. 그녀의 여동생이 아버지를 쳐다보자 째려봤다며 뺨을 때렸다. 여동생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더욱 화가 난 아버지는 남은 자식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옷을 벗어던지고 속옷 바람으로 “오늘 너희 다 죽었다”며 칼을 찾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아버지를 붙잡았다. 실랑이 끝에 아버지가 넘어졌다. 어머니가 “정신 차려. 이러면 안 돼”라고 했지만 버둥대는 아버지는 “다 죽이겠다”며 악을 썼다.

아버지 몸 위에 올라탄 중학생 남동생이 아버지의 두 팔을 잡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어머니는 줄넘기 줄 2개를 가져와 아버지의 손과 발목을 묶었다. 아버지는 “이거 안 풀면 너희 다 죽는다”고 소리쳤다. 그녀는 청색 테이프를 길게 끊어 아버지의 입에 붙였다. 노려보는 아버지의 눈길이 무서워 아버지가 사용하던 안대도 씌웠다. 안방으로 옮겨 이불로 아버지를 감싼 뒤 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악몽은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술이 깨면 늘 그랬듯 온순한 아버지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어머니를 마구 때렸다. 칼로 찌른 적도 있다. 세 딸이 자라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가로막자 그들도 때렸다. 아들이라는 이유로 남동생만은 맞지 않았다. 술이 깬 다음 날이면 아버지는 풀이 죽어 조용히 앉아 있곤 했다.

하지만 다음 날 새벽 아버지는 숨을 쉬지 않았다. 그녀와 어머니는 존속살해 및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지난달 4일, 5개월을 끈 국민참여재판이 끝났다. 재판부는 모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단지 과잉방어를 인정해 존속폭행치사와 폭행치사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그녀와 어머니는 구치소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더이상 예전의 집이 아니었다. 피해자로서의 기억은 사라진 채 가해자로서의 죄책감만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집을 떠날 수도 없다. 갈 곳이 없다.

그녀의 사연을 들으며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유성의 인연’이 떠올랐다.

“아무리 괴로워도, 죽음보다 더 괴로울지라도, 단지 살아줘.”

드라마에서 고이치(니노미야 가즈나리)는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범인에게 총을 겨눈 채 말한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더욱 분명해졌다. 행복한 가정을 짓밟은 가해자는 눈앞의 범인, 피해자는 자신과 동생들. 그러나 14년 동안 반드시 범인을 찾아 죽이겠다고 다짐했던 세 남매의 맏이는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용서든 또 다른 형벌이든, 분노를 쏟아내며 외칠 수 있는 가해자가 있다는 것은 차라리 축복이다.

그녀는 그 축복마저도 누리지 못했다. 소리칠 누군가조차 갖지 못한 그녀는 그날의 악몽이 구석구석 도사린 월 35만 원짜리 방에서 자살을 꿈꾼다.

그녀에게 고이치의 말을 건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소설가를 꿈꾸는 한 친구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 비현실적일 때가 많아.” 할 말을 찾지 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동그라미 동아일보 기자. 사연을 지면에 싣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취재수첩을 내준 tigermask 기자와 함께 썼습니다.

desdemona98@naver.com
#이한줄#유성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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