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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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8일 03시 00분


“당신 혼자 헤엄쳐서 돌아가도 돼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1946년)


30대가 여러 명, 40대도 더러 있는 친목 모임에 최근 참석했다. 그중 가장 나이가 어린 멤버가 실연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대화가 오가는 중에 어느샌가 ‘힐링 캠프’ 같은 분위기가 됐다. 그리고 ‘패널’의 절반 정도는 살짝 연애 시절로 돌아간 기분과 함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자기감정이나 행동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즐거움을 느끼는 것)를 느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라며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면 그 능력이 감퇴한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그의 말이 옳다면 위로받을 청춘이 많을 것 같다. 하루키의 주장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것도 인생의 짧은 시기에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축복이라고 암시한다.

지혜가 깃든 역설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 명제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내 생각엔 기본적으로 사람은 나이와 관계없이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고, 그런 만큼 상처도 받는다. 나이를 제대로 먹은 사람이 잘 상심하지 않는 것은 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감수성이라고 여기는 인간 특성의 상당 부분은, 기실 얄팍한 자존심 아닌가 싶다.

하루키 방식 외에 ‘500일의 썸머’(2009년) 방식의 위로법도 있다. “그 사람을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하는 거 알아. 하지만 내 생각엔 아니야”라고 다독여주는 것. 똘똘한 여동생 역을 맡은 클로이 머레츠의 이 대사는, 영화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위로법의 문제점은 역설적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지현이랑 헤어졌어. 응, 걘 너의 운명의 상대가 아니야. 혜교랑 헤어졌어. 걔도 너의 운명이 아니야. 그러면 도대체 내 운명의 상대는 누구야? 지금 내가 사귀는 사람은 운명의 상대 맞아? 언제 어떤 상황에도 적용 가능한 이 명제는 ‘운명의 상대’라는 개념을 아예 봉쇄한다. 그런데 남녀 간의 사랑은 운명의 상대란 개념을 꼭 필요로 한다.

클로이 머레츠라면 “그 상대가 네 운명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라며 웃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나이로는 증조할머니뻘인 라나 터너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서 이미 적절한 해답을 제시했다.

코라(라나 터너)는 불륜 관계인 프랭크(존 가필드)와 공모해 남편을 죽인다. 그러나 두 살인자는 이후 서로를 믿지 못하고 상대방이 언제 자신을 배신할지 몰라 두려워한다. 코라는 프랭크를 바다로 데려간다. 그녀는 힘이 빠져 더 헤엄칠 수 없을 때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남자에게 말한다. “당신 혼자 헤엄쳐서 돌아가도 돼요.”

남녀상열지사가 사랑이 되는 순간을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나는 이 장면을 그리겠다.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 보이는 것은 수평선뿐이고, 두 남녀는 간신히 목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말한다. “당신 혼자 헤엄쳐서 돌아가도 돼요.” 당신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사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는 게 나아요, 라는 내맡김. 또는, 당신과 함께 육지로 가지 못하느니 나도 여기서 같이 빠져죽겠어요, 라는 결심과 약속. 그런 헌신이 사랑을 운명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내 운명인지 아닌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아닌 그의 행복을 위해 바다에서 혼자 빠져죽을 수 있을지를 자문해 보면 된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연인들에겐 아이러니하고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결말이 아니더라도 “You could swim back by yourself”라는 라나 터너의 대사는 충분히 슬프고 로맨틱하다.

tesomiom@gmail.com

tesomiom 이안류(역파도)에 휩쓸렸을 때에는 해변 쪽으로 나오려고 애쓰는 것보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이 한줄#포스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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