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잘 살아요, 게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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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22일 03시 00분


“내일도 볼 것처럼 안녕 하자.”
태양속으로’(SBS·2003년)에서 나왔다고 그녀는 기억했다

《그가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건넸다. “앞장에 짧게 글 하나 썼어.” 누가 기자 아니랄까 봐. 책을 펼쳤다. 오렌지색 종이 위에 또박또박 그려진 검은 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사직서를 쓰겠다고 말한 날.’

갤럭시S3 화면에서 ‘전화’를 누르면 ‘키패드’ 옆으로 ‘즐겨찾기’가 있다. 사용자가 등록해 놓은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늘어선 곳. 등록하는 것이 귀찮아 빈칸으로 남아 있다. 그 대신 ‘자주 연락하는 사람’이 표시된다. 그 목록 제일 위에 올라와 있던 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어머니, 여자친구의 이름이 몇 칸 아래에 떠 있다.

“한번 읽어 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몇 장을 더 넘기자 ‘1할 2푼 5리의 승률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그래서, 친구들에게’라는 작가의 글이 적혀 있다. “나중에 봐. 다른 사람들이 앞에 쓴 글 보면 좀 그렇잖아.” 몇 년 전부터 네가 쓴 글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었거든. 책을 가방 속에 넣었다.

“난 그 말이 좋더라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기아 타이거즈의 팬이었던 그녀도 떠났다.

“오늘 우리가 이겨야 할 텐데….”

올해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진출을 놓고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할 때였다.

“아니에요. 질 거예요.”

“악!”

한공간에서 하루 종일 함께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녀를 ‘놀려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어느새 마음으로는 기아를 응원하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기아가 이겼으면 좋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난해에도, 올해도 그랬듯, 내년에도 야구 중계를 틀어놓은 TV 앞에 그렇게 함께 있을 줄 알았다.

몇 달 전 저녁에는 회사 입사 동기 한 명과 함께 경찰서 근처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빨리 먹어야 돼”라는 말과 함께 건네준 쇼핑백에는 직접 만들었다는 간장게장이 담겨 있었다. 주말 내내 그 간장게장으로만 밥을 먹었다.

“정말 맛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다 맛있다고 했거든. 나보고 간장게장집 열라고 하던데. 간장게장집 이름은 ‘게장수’로 하래. 게장수.(웃음)”

‘누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또 다른 벗, 그녀가 남긴 것은 드라마 ‘태양속으로’ 속 대사 한마디. “내일도 볼 것처럼 안녕 하자.” 석민(권상우)과 혜린(명세빈)이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는 장면에서 석민이 한 말이라고 했다. “밝은 안녕이지만, 슬픈 안녕이지.”

그런데 사실 드라마에 이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1회 대본부터 마지막 회인 20회 대본까지 꼼꼼히 읽어봤지만, 없었다. ‘당연히 있겠지’ ‘어라?’ ‘설마, 아닐 거야’ ‘정말 없잖아!’ 그 비슷한 말도 없었다. 그 대신 석민은 결혼식을 앞둔 혜린에게 “행복해야 돼요.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예요. 혜린 씨 상처받지 않는 거, 다치지 않는 거, 행복하게 사는 거, 그거뿐이에요”라고 말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던 거예요?

기억이 흐릿해지듯, 인연도 흐릿해진다. 이미 삶 속에서 지나온, 같은 공간 속 인연들이 희미한 것처럼. 언제든 연락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지만 바쁜 삶은 또 다른 변명거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래도 박민규의 소설을 볼 때면, TV 속 권상우와 명세빈을 볼 때면 두 사람이 생각나겠지. 그걸로 됐다. 나라도 작은 끈 하나는 계속 붙잡고 있을 테니까.

desdemona98@naver.com 동그라미 동아일보 기자.
잘 살아라. 그리고 건강 유의하세요.
#태양속으로#권상우#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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