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눈물나는 선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9일 03시 00분


“내가 아내에게 선물한 보석이 다른 여성의 피부에 닿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내 유언입니다.” 윈저 공작

가끔 남자들이 내게 묻는다. “아내에게 뭘 선물하면 좋을까요?” 쇼퍼홀릭인 나는 신용카드를 맡아 쥐고 백화점에 나온 양 신이 난다. ‘몇 층으로 가야 할까.’ 빙빙, 카드를 돌리며 말한다. “다음 질문에 답하시오.” 부인 나이와 외출 시 옷차림과 메이크업은? 구두 힐의 높이, 액세서리 착용 빈도는? 이런 질문 앞에서 많은 남편이 얼굴을 붉힌다. ‘아내의 취향’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치질환자라고 고백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뉴스에 명품 브랜드가 나올 때 부인의 눈빛을 봤나요? 반짝였다면 가방을, 쓸쓸했다면 같은 브랜드의 향수를 사도록 합시다. 신은 당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청구서를 보내실 겁니다.

십중팔구. 남편들은 명품 브랜드 선물 따위, 부인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구두를 사주면 달아난다는 흑색선전을 서슴지 않으며 싸고 실용적인 선물을 찾는다. 생일에 베스트셀러 서적을 선물하는 몹쓸 짓도 한다. 책 고르기가 구두 고르는 일보다 쉽다고 생각하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 여자는 라마나 마하르시만큼 영적, 정신적 존재라고 말하는 남자들의 본심에는 ‘잡은 물고기’에게 돈 쓰기 아까운 마음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 헨리의 동화 ‘크리스마스 선물’은 선물 쇼핑에 대한 고전적 충고다. 첫째, 머리핀이나 시곗줄처럼 남들에게 자연스럽게 자랑할 수 있는 아이템을 살 것. 둘째, 선물의 순수성은 실용성과 반비례하므로, 세제나 다림판보다는 보석처럼 ‘쓸모없는’ 것을 살 것. 셋째, 그 순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선물할 것 등이다.
예를 들면, 유난히 추운 겨울 월급쟁이 남편이 몇 년 동안 모은 적금을 털어 부인에게 선물하는 코트. 또 예를 들면, “내가 왕실에서 받은 보석을 모두 아내에게 상속합니다. 단, 내가 아내에게 선물한 보석들은 다른 여성의 피부에 닿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쓴 유언장.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물론 세상에 단 한 사람, 영국의 윈저 공뿐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왕위(원래 에드워드 8세였다)에서 내려왔던 그는 죽을 때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 보석보다 아름다웠던 그녀에 대한 추억, 그 순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부인에게 선물한 것이다.

윈저 공과 심프슨 부인의 결혼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땐, 사색당파가 얽힌 역사적 배경을 찾아내려고 했다(음습한 이야기가 없진 않다). 하지만 유언을 보고 나는 이 멋진 남자의 순정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심프슨 부인은 미인이라기보다 카리스마 넘치는 시크(chic)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대서양을 넘나드는 영국 귀족들과 미국 부호들의 ‘혼맥’ 사교계에서 예술과 패션을 선도했다. 20세기 남성 복식사를 바꿔 놓은 당대의 패셔니스타 윈저 공도 이런 면에 반했을 거라고 상상한다. 윈저 공은 보석상 카르티에에게 꽃도 나비도 아닌, 표범 형상 브로치를 주문해 아내에게 선물했다. 이후 표범은 카르티에의 상징적 아이콘이 됐지만, 윈저 공작부인만큼 표범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전무후무하단다.

심프슨 부인은 윈저 공을 처음 만난 날 입었던 드레스의 파란색을 기념해 결혼식 때도 ‘심프슨 블루’라 불린 같은 색깔의 웨딩드레스(이 디자인은 한국의 재벌가 결혼식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를 입었고, 윈저 공은 푸른색 보석을 눈에 띄는 대로 사서 그녀에게 선물했다. 물론 그런 선물을 아무나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내미는 선물이 ‘크리스마스 선물’인지 아닌지 알아본다. 자, 아직도 그녀에게 무슨 선물을 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연락 요망이다. 기쁜 마음으로 퍼스널 쇼퍼가 돼 드리겠다.

holden@donga.com

消波忽溺
쇼퍼홀릭에게 애정을 느끼며 패션과 취향에 대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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