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대기업 샐러리맨이던 30대 중반의 장석원 씨는 불현듯 사표를 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 장 씨가 그림으로 밥벌이하겠다는 꿈을 꾸자 주변인들 모두는 허황되다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는 재미에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매일 꾸준히 작업에 몰두하며 3년을 살았다. 그림들은 그의 시간과 노력을 양분으로 무럭무럭 유쾌하게 자랐다. 그 유쾌함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그는 ‘밥장’이라는 위트 있는 이름의 일러스트레이터가 됐다.
그는 성공했다. 유명 패션 브랜드와 협업을 하고, 잘 팔리는 단행본도 여러 권 출간했으며 인터뷰와 강의 요청이 쇄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품 브랜드가 전개하는 환경 캠페인의 모델로도 활동했다. 이쯤 되면, 순식간에 이뤄낸 드라마틱한 그의 성공 스토리에 배가 아플 법도 하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은 자신의 재능을 세상과 나누고, 나눔의 즐거움을 만끽할 줄 아는 작가다. 외롭고 무거운 시간을 버티게 해준 그림 그리는 재미를 세상과 공유하고 싶어서 농촌 구석구석을 누빈다. 그리고 그 노력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아름다운 근성도 지녔다. 21일 오전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마련한 그의 작업실 ‘믿는 구석’에서 그의 그림, 그리고 나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예술가가 창작활동으로 스스로의 고뇌를 치유한다. 당신도 그런가.
“전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나는 몸으로 그림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흥에 겨워 밤새 그림을 그리면서 몰입의 힘을 알게 됐다. 그림을 시작할 때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만 표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면을 들여다보게 됐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면서 개운해졌다. 무엇이든 비워내야 다시 채울 수 있으니까. 내 그림을 좋아하고, 내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힘이 난다.”
―나눔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나.
“2007년부터 크고 작은 재능 나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재능 나눔을 통해 스스로 ‘지금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라고 느끼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봐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공헌하면 할수록 재미는 배가됐다. 자존감이 올라갔고, 더 창의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2009년 전북 완주의 기찻길 작은 도서관에 벽화를 그린 이후로 완주군과 다양한 작업을 꾸준히 이어온 결과, 지난해 완주 명예군민이 되었다. 기분이 어떤가.
“처음 완주를 찾았을 때는 나를 경계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계속 찾아가 즐겁게 작업하는 동안 서로의 마음이 열리고, 신뢰가 생겼다. 뭐든 꾸준히 해야 연대의식이 생긴다. 어느 순간 나를 ‘우리 사람’으로 대해 주더니 때 되면 맛있는 것도 보내주신다. 내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오롯이 내 재능을 믿고 부탁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러 가는 여정도 출장이 아닌 여행의 느낌이다.”
―농촌 재능 나눔을 통해 현지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과 그 소통의 결과가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공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 사람들은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공유하려고 한다. 내 만족을 위한 작업이라면 굳이 농촌까지 갈 이유가 없다. 내가 그림에 처음 눈을 뜨고 즐거움을 느꼈던 것처럼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그래서 직접 그림을 그릴 기회를 주는데, 한번 자기 손을 타면 스스로 주인인 느낌이 들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 공간에 대한 애착이 생긴다. 자기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테오가 있어 고흐가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듯, 나 역시 함께 호흡하는 경험들이 더 좋은 그림을 그리게 되는 동기가 된다.”
―스스로 규정한 재능 나눔의 범주나 한계가 있나.
“이걸 하면 뭐가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거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진행될 것 같으면 안 한다. 또 작가가 나누는 재능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해주는 경우에만 참여한다. 기업에서 재능 나눔을 제안하면서 클라이언트처럼 행동한다거나, 끊임없는 수정을 요구하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이는 재능 나눔이라는 말이 오용되는 경우다. 재능과 시간 같은 무형의 자산을 나눌 때에는 유형의 것들을 기부할 때 얻는 제도적인 혜택이 없다는 점도 아쉽다. 예를 들면 기부금 영수증에 대한 소득공제 같은 것을 말한다. 시스템이 갖춰지면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재능을 나눔으로써 더 많은 가치들을 보상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도입되면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정부가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을 시민들 스스로 참여하고 해결해나가는 훈훈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재능 나눔의 전후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나.
“재능 나눔 활동을 통해 긴 호흡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나눔은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무엇이든 빨리 성취하기 위해 많은 비책이 필요한 세상은 매력이 없다. 시간과 정성을 바탕으로 천천히, 우직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게 됐다.”
-재능 나눔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첫째, 주체가 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탁을 받아도 참여 여부를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재능 나눔은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둘째는 자신의 재능을 존중해주는 사람들과 함께했을 때 느끼는 가치교환의 보람이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재능 나눔을 시스템화할 수 있는 노력이 밑바탕 되어야 한다. 제도적 시스템이 없다면, 스스로 제안할 수도 있다는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 적극적으로 재능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시스템을 확장시키다 보면 스스로를 위한 더 좋은 기회들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마을 공동체 회복위한 농촌 재능 나눔 공모사업▼
농촌 재능 나눔 공모사업은 2012년 시작했다. 농림축산식품부, 한국농어촌공사,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농정원)이 농촌 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사업이다. 지속가능한 마을 만들기와 공동체 회복을 기치로 내건다.
공모에 선정된 기업이나 단체는 다양한 공연,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농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농촌 재능 나눔 활동이 거리나 비용의 제약이 있는 점을 감안, 공모사업을 통해 선정된 단체에 한해 재료비, 교통비, 숙박비 등 재능 나눔 활동에 소요하는 경비를 일부 지원하는 사업도 한다.
스마일재능뱅크(www.smilebank.kr) 홈페이지를 통해 재능 나눔을 신청한 회원은 총 5만1137명, 재능 요청 건은 3193건이다(올해 8월 25일 기준). 마을공동체의 재능 요청 사안은 응급처치 교육, 학습지도, 장판과 도배 교체, 주택 수리, 인터넷 및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용법, 미용, 사진 촬영, 마을 동영상 제작 등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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