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법수치계곡 백패킹 & 캠핑… 구은수 대장과 함께한 계곡 트레킹
참가자들 서로 의지하며 산위 올라 지친 몸 달래주는 멋진 풍광에 감탄
오후 3시. 마침내 출발선에 섰다. 점심식사를 했던 강원 양양군 현북면의 어성전 마을회관에서 차로 3km 정도를 더 올라온 곳이었다. 목적지는 법수치계곡 상류에 위치한 두말리교. 계곡을 따라 5km 남짓을 부지런히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부연동 계곡은 현북면과 강릉시 연곡면이 경계를 이루는 이곳에서 합실골의 물줄기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법수치란 이름을 얻게 된다. 강원도에서 ‘오지 중 오지’로 알려진 그곳. 나는 오늘 그 깊고 청정한 강원도의 속살을 원 없이 들여다 볼 생각이다. 계곡의 거센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면서 말이다.
버스에서 내리며 바라본 하늘은 여전히 높고 푸르렀다. 햇살도 투명했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그 풍경, 그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평온한 가을하늘의 그것과 달리 계곡은 험상궂은 얼굴로 텃세라도 부리듯 허연 물보라를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수량이 늘어 그 기세는 한층 더했다.
그래도, 망설임 없이, 호기롭게 그 속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건, 고슬고슬 정성껏 지어낸 집밥에 곤드레가 듬뿍 들어간 점심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던 그 밥. 어릴 적, 친구들과 계곡으로 놀러갈 때면 어머니는 언제나 손수 밥을 다시 지어 먹이시곤 했다. 간식거리 챙겨줄 형편이 못 되니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둬야 한다며. 잡곡밥에 나물 넣고 고추장에 쓱쓱 비벼 먹던 그 밥이 어찌나 맛나던지. 나는 언제나 형들을 제치고 일등으로 밥공기를 비워내곤 했다. 오늘처럼.
이번 여정을 이끌 구은수 대장(산악인)을 선두로 계곡으로 이동했다. 네파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구 대장은 에베레스트와 파키스탄 낭가파르밧 등을 오른 베테랑 산악인. 사실 이번 여정을 준비하면서 그 어떤 장비보다 든든했던 뒷배는 바로 구 대장이었다.
망설임 없이 계곡으로 뛰어드는 구 대장의 모습에 덩달아 발을 들였지만, 이게 만만치가 않다. 한껏 들뜬 마음과 달리 거센 물살에 다리는 그야말로 천근만근이다. 물살도 물살이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다. 돌과 돌 사이에 은밀하게 숨어있던 이끼들. 누구는 ‘저격수’라 했고, 누구는 ‘지뢰’라 불렀던 그 이끼들. 한 걸음 내딛기가 조심스러웠던 건 거친 물살만큼이나 음밀하게 제 몸을 감추고 있던 이 녀석들 때문이었다. 법수치계곡의 멋스러운 풍경을 포기하고 발밑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걸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물의 깊이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끼라는 복병까지 포진해 있으니, 걸음은 더디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모든 신경을 발끝에 모으고 바닥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한 다음에야 간신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으니까.
수초가 우거진 구간에서는 가급적 수초 위를,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급한 대로 돌 틈에 발을 끼워 안전을 확보한 뒤 조심스레 뒷발을 당겼다. 돌 틈에 발을 끼워 이동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효과적이었다. 처음에는 눈으로 적당한 돌을 찾아가며 발을 옮겼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로는 눈보다 발의 감각에 의지해 위치를 확보해 나갔다. 계곡에선 눈보다 발의 감각이 더 예민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요령이 생기니 자신감은 덤으로 따라왔다. 주변 풍광에 잠깐씩이나마 시선을 줄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요령을 터득한 뒤였다. 명불허전이란 말처럼 법수치계곡의 풍광은 정말이지 멋졌다. 남성미 물씬 풍기는 선 굵은 산세며, 묻어날 것 같은 진초록으로 가득한 숲, 그리고 유리처럼 투명한 물이 어우러져 말 그대로 한 폭의 장엄한 풍경화를 연출해 내고 있었다. 양양을 대표하는 계곡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풍광이었다.
양양하면 으레 바다를 떠올리는 이가 많다. 하지만 계곡이 전부가 아니다. 여름이면 법수치계곡은 말 그대로 더위를 피해 찾아든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양양의 명소 중 명소다. 아마도 피서철이었다면, 지금처럼 호젓한 분위기에서의 계곡 트레킹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더딘 걸음에 점차 적응해 갈 즈음, 제법 널찍한 자갈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휴식. 물 밖으로 나왔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휴식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긴장이 풀리면서 기분 좋은 나른함이 밀려들었다. 다리를 짓누르던 모래주머니를 떼어낸 것처럼 몸도 가뿐했다. 배낭을 베개 삼아 그 안락함을 잠깐이나마 누려본다. 물안개처럼 스멀스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그 나른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짧은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 계곡으로 발을 들인다. 폭을 넓힌 계곡은 그만큼 얕아져 걷기에 한결 편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급류 뒤에 평수가 이어지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함이 이리 고마울 수가 없다. 힘겹게 오른 산머리를 지나 이제 막 시작되는 내리막으로 발을 들였을 때처럼 몸이 가볍다. 여전히 물이끼는 지뢰처럼 곳곳에 몸을 숨긴 채 짓궂은 장난을 걸어왔지만, 이제 그 정도 심술에는 가만히 웃어넘길 여유도 생겼다.
편한 걸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물살은 조금씩 다시 거칠어졌고, 그 거침을 감당할 수 없어 몇 번이나 물길을 벗어나 수초 속을 헤쳐 나가야 했다. 물에서 뭍으로, 그리고 다시 물로.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문뜩 짧은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우리가 지금껏 걸어온 길은 본디 인간을 위한 길이 아닌 자연의 길, 물의 길이었다는 사실. 지금껏 주인 행세를 하며 걸어온 그 길에서 우리는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 말이다.
그랬다. 우리는 이곳에서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잠깐 머물다 가는. 이번 네파 아웃도어스쿨이 계곡 트레킹으로 진행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공정캠핑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때, 머리로는 분명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자연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머리로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물에 몸을 담그고 3시간 정도를 걸은 뒤에야 머리가 아닌 몸이 그 단어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한 걸 보면 말이다. 가만 돌이켜 보면 물의 흐름에 조금씩 몸이 익숙해졌던 것도, 돌 틈 사이에 발을 끼워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머리가 아닌 몸의 차분한 적응 덕분이었다.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호들갑스럽게 머릿속을 맴돌던 조급한 걱정들과 달리 몸은 물에 발을 담그는 그 순간부터 천천히, 하지만 차근차근 자연에 몸을 맞춰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몸은 언제나 머리보다 빨리 언제 물러서야 할지, 또 무엇을 버려야 할지도 알고 그렇게 움직였으니까.
상류로 올라갈수록 길은 더 자주 끊겼다. 그만큼 걷기가 수월치 않았지만 처음과 달리 몸은 잘 적응했고, 또 잘 따라주었다. 문제는 갈수록 물살이 거세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좁아진 계곡의 폭만큼 거세진 물결. 길은 오롯이 물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한 번의 너울만 더 지나면 되는데, 기세가 만만치 않다. 더 이상 우회로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베이스캠프에 닿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물길이라 우회로 자체가 의미가 없었다. 물이 곁을 주지 않는 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맞서서 건너거나, 물러서는 것 중 하나.
여기서 물러설 순 없으니, 그 어느 때보다 과감히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구 대장의 말처럼, 자연을 거스를 순 없지만 가끔은 극복해야 하는 상황도 있는 법이니까. 지금까지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거친 물살 앞에서도 누구 하나 주눅 드는 사람이 없었단 사실이다.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는 표정에선 처음 계곡에 발을 들일 때 보였던 망설임은 더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네파 아웃도어스쿨의 매력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각기 다른 곳에서 모여든 이들이 어느 한 시점에 이르러 한마음으로 같은 곳을 보게 되는 것. 그 순간만큼은 누가 전문 산악인이고 누가 초보 트레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동료일 뿐이니까. 구 대장이 앞서 길을 열었다. 뒷사람의 스틱에 의지해 길을 열었고, 뒷사람은 다시 선두의 스틱을 잡고 그 길을 따랐다. 한 명, 두 명, 세 명…. 혼자였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이뤄낸 순간이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해 걷는 사이 어느새 저 멀리 오늘의 목적지인 두말리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늑한 공간에 자리한 베이스캠프. 그곳에 올라섰을 때, 거칠게만 느껴지던 계곡은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 되레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한 길동무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둠이 내리는 속도만큼 계곡은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하얗게 부서지던 물보라도, 거친 숨 토해내던 물줄기도 연극이 끝난 무대 위 배경처럼 그렇게 서서히 지워져 갔다. 물에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고 저녁 준비에 앞서 텐트에 잠시 지친 몸을 뉘었다. 순간, 오후에 느꼈던 나른함과는 또 다른 나른함이 눈꺼풀 위로 지그시 내려앉았다. 그렇게 설핏 잠이 들었던 걸까. 귓가에선 여전히 계곡의 거친 숨소리가 맴돌았고 살짝 열어둔 텐트 안으로는 희미하지만 선명한 한 줄기 빛이 스미고 있었다.
너무도 또렷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 기억들. 아마도 그날 밤 나는 법수치계곡을 꼭 빼어닮은 은하수를 본듯도 하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염없이 흘러내리던 그 계곡을 닮은 은하수를.
※ 네파는 ‘아웃도어스쿨 시즌2’의 두 번째 여정으로 낚시 애호가를 위한 ‘피싱 캠프’를 선보인다. 이번 행사는 네파 익스트림팀 이상학 강사와 함께 9월 26, 27일 충북 충주시 삼탄강 일대에서 열린다. 참가 희망자는 네파 아웃도어스쿨의 홈페이지(school.nepa.co.kr)를 통해 21일까지 신청하면 된다. 선발 인원은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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