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未生 남자여, 그래도 브라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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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쫄이 의상과 망토 대신 윗 단추를 풀어헤친 와이셔츠에 구겨진 정장바지, 주로 슬리퍼를 끌고 다닌다. 근육질은커녕 음주로 다져진(?) 뱃살에 눈은 항시 충혈돼 있다. 싸움터는 대기업 사무실. 전화벨 소리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입사시험과 거래처와의 미팅, 실적 경쟁과 프레젠테이션, 사내정치까지 숱한 전투가 벌어진다.

tvN 드라마 ‘미생’은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화이트칼라 영웅의 세계를 그리는 데 성공했다. 주인공은 프로 바둑 기사 입단에 실패한 고졸 검정고시 출신의 ‘무스펙’ 장그래(임시완)와 워커홀릭에 열정은 넘치지만 ‘빽 없는’ 오상식 과장(이성민·오 과장은 드라마 10회에서 과장 7년 만에 차장으로 승진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들의 무대는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의 말마따나 “볼펜 하나, 딱풀 하나 때문에 울고 웃는 세계”다. 그러나 일하고 부딪치는 가운데 살아남는 이 평범해 보이는 삶이 얼마나 비범한 것인지 미생은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미생의 영웅들은 전 세대로부터 공감과 지지를 받는다. CJ E&M의 시청률 분석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채널의 주요 시청층인 20∼40대 여성뿐만 아니라, TV와 거리를 두고 지내는 30대 이상의 남성들에게도 인기를 얻고 있다. 대중은 “버틴다는 건 완생으로 나아가는 것” “바둑판에 의미 없는 돌은 없다” “꼼수는 정수로 받는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같은 드라마 속 대사를 잠언처럼 공유하고 되새김한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젊은층은 비정규직 장그래의 설움이, 회사에서 위아래로 치이는 중년의 샐러리맨들은 오 과장, 아니 오 차장의 애환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유리천장의 벽에 부딪치는 안영이(강소라)나 오 차장과 장그래 사이에서 중재자 역을 하는 김 대리(김대명) 역시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지는 이들이다.

공감의 힘은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나온다. 윤태호 작가는 원작 만화를 그리기 위해 3년간 종합상사를 취재했다. 드라마가 나오기까진 1년 7개월의 준비기간이 더 필요했다. 보조 작가 2명이 실제 종합상사에 한 달 넘게 상주하며 신입사원 교육부터 직원 회식자리까지 동석했다. 공희정 대중문화 평론가는 “지금까지 대중문화에서 직장은 사장 오너의 아들이 연애나 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이었다면 ‘미생’의 세계는 현실에 닿아 있다. 보통 직장인의 일상과 애환을 주인공인 장그래와 오상식뿐 아니라 주변의 대리, 과장, 부장들까지 각각의 입장에서 세밀하게 보여주어 대중의 공감대를 얻어냈다”고 평했다.

첫 회 1%대에서 시작한 미생의 시청률은 계속 상승해 최근 6%를 돌파했다.(닐슨코리아 전국 시청률 기준) 원작 만화는 한 달 만에 170만 부 가량 팔리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한편으로 미생의 인기는 갈수록 힘든 세상의 반영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세상의 부당한 차별조차 늘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이라며 자기 탓으로 돌리는 장그래나 “버티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오 차장 모두 ‘단단한 세상의 벽’을 실감하고 있는 이들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미생은 조직 내에서 버티고 살아남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대중을 위로한다. 드라마의 인기는 그만큼 우리가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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