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건 1989년 1월 1일부터. 여행자유화이후 가장 눈에 띈 것은 대학생 배낭여행이었다. 80년대 중반 이전 학번들의 대학시절엔 꿈도 꾸기 어려웠을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젊은 시절 놓쳐버린 ‘청춘의 특권’을 뒤늦게나마 실현하려는 중장년이 점점 늘고 있다. 아프리카대륙남단 케이프타운(남아공)에 취재갔을때였다. 60대 초반 남성 세 분이 등산복차림으로 워터프론트를 활보하고 있었다. 킬리만자로 산정을 오른 뒤 귀로에 희망봉을 보기 위해 찾아온 배낭여행자였다. 이런 이들을 세계도처에서 보았다. 물론 요즘은 오지가 아닌 한 무거운 배낭을 짊어 매는 대신 캐리어를 끌고 다니지만 배낭여행 정신(Spirit)만큼은 이어진다. 어디든 발길 닿는 대로, 내키는 곳을 찾는 자유로운 영혼의 출중한 기동성이다. 더구나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면 지구상 어디든 원하는 정보를 즉석에서 얻어 떠날 수 있다. 덕분에 여행의 기동성과 자유로움은 더더욱 빛을 발한다. 스마트폰과 캐리어로 무장한 신속기동의 자유여행자 ‘FIT(Frequently Independent Traveler·’에프아이티‘라고 읽음)를 칭하는 조어도 등장했다. ’플래시패커‘(Flashpacker)다. 플래시란 ’전광석화‘(電光石火)다. 그래서 기자는 80년대 중반 이전 학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플래시패커‘야 말로 당신 몫이라고. 여행엔 네 가지가 필요하다. 돈·건강·열정·시간인데 그중에서도 첫 번째는 시간이다. 그런 점에서 은퇴는 축복이다. 적어도 여행에 관한한은. 그러니 배낭여행세대에 들지 못한 한(恨)은 스스로 플래시패커의 주역임을 자각하는 순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다. 그걸 실험할 여행을 소개한다. 스위스 전국을 기차패스로 여행하는 ’그랜드 레일 투어‘(Swiss Grand Rail Tour)다. 장담컨대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여행이 될 수 있다. 》
지난 22년간 여행전문기자로 일하며 세상 곳곳에서 특별한 열차를 타봤다. 모두 나름대로 멋진 여정과 풍광을 선사했고 매력 또한 남달랐다. 캐나다로키산맥과 알래스카 심부를 운행하는 로키마운티니어와 드날리스타, 남아공을 종단하는 세계최고급 블루(Blue)트레인과 증기기관차 로보스(Lovos)트레인, 그걸 본 딴 식민지시대 풍 페닌슐라 라인(말라카¤조호르바루), 스위스의 빙하특급(Glacier Express), 페루 안데스고원의 마추픽추 행 오리엔트특급(하이럼빙엄) 등등.
이들은 모두 경관이 멋지거나 특별한 노선만 운행하는 이벤트 성 관광전용 열차다. 그런 만큼 그 나라 철도에서도 특별대접을 받는 열차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스위스가 그렇다. 어떤 열차를 타도 모두가 특별해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알프스설산 고봉이, 고개를 돌리면 산등성 초원에서 소와 양이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차창으로는 수시로 아름다운 호수와 호반마을이 지나고 고딕 첨탑의 교회와 고풍스런 석조 건물로 이뤄진 강변 중세마을도 수시로 조망된다.
그뿐이 아니다. 어떤 나라의 열차도 스위스국철과 사철(私鐵)의 시설과 서비스를 능가하지 못한다. 객차의 좌석과 짐칸은 물론 화장실과 장애인 편의시설까지 완벽하다. 그리고 전국철도노선은 거미줄 이상으로 촘촘하다. 게다가 모든 마을이 역을 중심으로 운행하는 포스트버스(Post Bus·마을버스)노선에 든다. 높은 산의 꼭대기마을까지도. 그러니 이 버스는 물론 호수를 오가는 배까지 통용되는 스위스패스 한 장만 있으면 어디든 안전하게 찾아갈 수 있다. 운행시각도 정확하다. 스위스시계의 명성 그대로인데 오죽하면 이런 농담까지 들린다. 스위스열차에 시계를 맞추라는.
그런 스위스철도여행이 이제까지는 몇몇 이름난 ’관광특급‘위주로 이뤄졌다. 알프스의 마터호른 봉 아랫마을 체르마트와 호화스키휴양지 생모리츠를 오가는 ’빙하특급‘이 대표적이다. 이 노선(291km) 운행시간은 8시간3분. ’세상에서 가장 느린 특급열차‘다. 평균시속이 36km에 그쳐선데 91개 터널과 291개의 다리를 건너고 해발2033m 오베르알프(고개)를 넘는 동안 그 특별한 풍광을 천천히 즐기도록 배려해서다.
수많은 명소를 지나는 동안 와인에 식사까지 즐길 수 있는데 객차 자체도 디자인이 특별하다. 천정 일부까지 통 유리창을 확장시켜 스위스알프스의 설산고봉과 하늘, 따사로운 햇볕까지 즐기게 한다. 그리고 빨간 빛깔의 실내와 직물시트가 연출하는 안락한 실내는 여행이 이렇게 편안하고 즐거울 수 있음을 새롭게 인식시킨다.
그런 관광특급이 스위스철도에는 몇 개 더 있다. 베르니나특급, 보랄펜특급, 골든패스라인, 윌리엄텔 특급 등등. 이처럼 다양한 특급관광열차를 한 방에 다 경험할 방법이 있다. 스위스트래블시스템(스위스여행공사)이 개발한 ’스위스 그랜드 레일 투어‘다. 스위스 주요관광지를 특급열차와 일반열차를 이용하는 7개 코스를 통해 연이어 찾아 볼 수 있는 방식. 그중 두 코스에선 버스와 보트까지 동원된다. 그랜드 레일 투어에 걸리는 날수는 최소한 일주일. 하지만 여유 있게 즐기려면 12박13일은 요구된다. 체크리스트
제1코스
출발역은 취리히공항. 대한항공 직항편이 닿는 곳으로 공항터미널만 나서면 철도역이다. 첫 목적지는 동부의 수도라 할 생갈렌. 콘스탄츠호반의 생갈렌의 핵심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중세풍의 구도심. 그 고풍스러움은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거기서 꼭 들를 곳은 손 글씨의 고서적 14만권이 소장된 베네딕트수도원의 도서관. 바로크양식의 보물로 손꼽히는 건축물인데 이런 구도심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이른 아침 빈 거리 홀로산책이다. 생갈렌 가는 도중 지나는 샤푸하우젠에선 차창을 통해 유럽최고낙차의 라인폭포도 본다.
제2코스
목적지는 루체른뮤직페스티벌의 무대인 호반도시 루체른(독일어권). 클라우디오 아바도(이탈리아 지휘자·2014년 작고) 생전엔 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말러교향곡을 들으러 일부러 찾던 팬들로 명성을 더했던 음악도시다. 빙하기의 유산을 간직한 ’빙하정원‘도 루체른에 있다. 생갈렌에서 타는 루체른 행 열차는 보랄펜(Voralpen)특급. 파노라마로 전개되는 아름다운 정경이 이 특급열차의 매력이다. 도중엔 돌을 99m나 쌓아 세운 철도전용 싯테르석교(스위스 최고도)도 지난다. 제3코스
’스위스 리비에라‘(Riviera·해안)의 중심 타운인 몽트뢰(프랑스어권)로 간다. 리비에라라는 그 별칭은 칸느 니스로 대표되는 ’프렌치 리비에라‘(프랑스남부의 지중해안)에서 왔는데 차이는 해안(海岸)이 아니라 호반(프랑스어로는 레만·독일어로는 제네바호수)이란 것. 가까운 호반마을 브베(Vevey)엔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의 박물관 ’채플린스 월드‘가 있다. 호수 수면에 떠있는 듯한 중세 시용성도 멀지 않다.
루체른에서 몽트뢰로 갈 때는 ’골든패스라인‘(GoldenPass Line)이란 관광열차를 탄다. 8개의 호수와 두 언어권의 세 지방(중부 독일어권·베르너고원·호수의 프랑스어권)을 잇는 철도다. 베르너고원(인터라켄오스트 역 하차)은 산악열차로 오르내리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철도역 ’톱오브유럽‘(융프라우요흐)이 있는 융프라우지역 산악. 그곳의 그린델발트나 인터라켄에서 하루 이틀 묵는다면 금상첨화. 아이거북벽 아래 클라이네샤이덱의 초원에서 즐기는 한여름 알프스하이킹은 스위스 여행의 백미다.
골든패스라인엔 파노라믹(최전방 전망칸 등 전망 위주로 설계한 모던스타일)과 클래식(19세기 유럽왕가 전용열차의 고전적 스타일) 두 타입의 열차가 운행된다. 그러니 융프라우지역에서 머문다면 몽트뢰 가는 길에 번갈아 이용한다. 제4코스
호수를 벗어나 마터호른 봉 아래 산악마을 체르마트를 찾는 일정. 도중 비스프(Visp)에서 톱니바퀴로 협궤철도를 오르는 기차로 갈아타는데 그 니콜라스계곡 막장의 체르마트까지는 고도차가 900m나 될 만치 가파르다. 체르마트는 화석연료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차 없는 마을‘(Car Free Village). 역 마당엔 그래서 소형 전기 차와 마차만 보이는데 공사화물운반차량마저도 전기 차다. 마을 건물도 대부분 전통샬레(다층목조건물)여서 알프스의 고전적인 산악마을 느낌이 강하게 어필한다.
마터호른 봉은 마을 어디에서고 보인다. 이 암봉의 능선은 국경. 앞면만 스위스 것이도 뒷면은 이탈리아 영토다. 그런데 두 면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스위스 쪽과 달리 이탈리아 쪽은 형편없다. 봉우리 아랜 빙하지대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스키를 즐긴다. 한겨울엔 스키로 능선너머 이탈리아마을(체르비니아)을 오간다. 마터호른 봉 옆 클라이네마터호른은 마을(체르마트)을 오가는 케이블카 정상역. 여러 볼거리와 레스토랑도 있다. 또 사나흘을 걸어도 모자랄 다양한 트래킹 트레일도 거기서 시작된다.
제5코스
드디어 스위스 동서횡단 빙하특급열차로 동단의 호반스키휴양지 생모리츠를 찾는다. 그랜드 레일투어 7개 코스 가운데 거리와 탑승시간이 가장 멀고 길다. 풍경중 압권은 65m높이 란트바써 석교 통과. 객차는 통유리창이 천정일부까지 확장된 파노라마천정을 갖춰 좌석에 앉은 채로도 협곡조망에 거침이 없다.
빙하특급은 2033m 높이 오베르알프 고개도 넘는다. 이곳은 한여름에도 눈 덮인 빙하와 호수를 볼 수 있는 곳. 그 아래 산중마을 안데르마트(1437m)도 하루 쉬어갈 만하다. 로마시대부터 스위스의 동서남북을 잇는 십자로이자 이탈리아(티치노)로 통하는 고개길목.
생모리츠는 호수가 계단처럼 포진한 엥가딘계곡 해발1822m 호반에 들어선 휴양마을. 호수 양편의 산악이 한겨울엔 모두 스키장이다. 1928년과 48년 두 차례나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설상스포츠 발상지로 산중임에도 맑은 날이 연간 300일을 넘길만큼 좋은 기후로 일찍부터 세계부호의 별장지로 이름났다.
제6코스
이탈리아어권의 호반마을 루가노가 목적지다. 철도와 연계버스를 두루 탑승한다. 철도는 베르니나고개 너머 티치노(이탈리아)까지 운행하는 베르니나(Bernina)특급.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철로로 운행하는 관광열차다. 이게 세계유산에 등재된 건 주변 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 갖은 난관구간을 공학기술과 노력으로 관철해서다. 티치노에서 루가노까지는 특급버스로 이탈리아 땅을 관통한다. 계곡을 빠져나오면 펼쳐지는 코모호수를 따라가는 길이다. 제7코스
북상해 스위스중부의 호반마을 루체른으로 향한다. 이용열차는 ’윌리엄텔 특급‘.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석궁으로 맞춰야 했던 스위스 건국신화(14세기) 주인공인 윌리엄 텔의 이름을 열차에 붙인건 신화의 무대인 우리(Uri)칸톤을 통과해서다. 도중에 플뤼엘렌에서 내려 증기선(혹은 일반선박)으로 갈아탄다. 루체른호수를 가로 지르는 뱃길로 루체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철도패스
외국인전용 ’스위스 트래블 패스‘ 구매. 기간별로 네 종(3·4·8·15일). 15일 권 가격(CHF·스위스프랑)은 △1등석 704CHF(78만8500원) △2등석 440CHF(49만2800원). 여기엔 △박물관(409곳) 무료입장 △산악열차 50%할인 특전 포함. 스위스철도(SBB)는 여섯 살 미만,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동행한 16세미만 자녀 한 명은 운임을 받지 않는다. 26세미만은 15% 할인가의 ’스위스 트래블 유스패스‘ 이용. 상세정보는 스위스트래블시스템의 한글홈페이지 참조. 철도패스는 국내여행사에서 판다. 1CHF는 약 1120원.
철도이용
스위스철도 애플리케이션(SBB)이 만능키다. 승하차 및 환승 열차의 출발도착시각과 글라이스(Gleis·승강장)번호는 물론 전후 다양한 운행스케줄이 영어로 알기 쉽게 제공된다. 여행계획 세우기
7개 코스를 모두 이용할 경우 숙박지부터 정하고 숙소예약을 한다. 그런 뒤 계획이 완료되면 그 날수에 맞는 철도패스를 구입한다. 출발은 어디서 해도 상관없다. 패스만 있으면 철도와 버스로 어디든 갈 수 있다. 스위스정부관광청 한글홈페이지의 그랜드 트레인에서 ’가상투어‘를 클릭하면 보다 세밀하게 여행루트를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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