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 살이 되면 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오토바이를 사고 싶어요. 할리데이비슨. 멋진 걸로. 돈도 모아놓았어요. 이런 얘길 했더니 주변에서 걱정하시데요. ‘다리가 닿겠니?’ 후훗. 그거 타고 세계일주 하고 싶어요.”
가수 김광석은 1995년 8월 15일 공연 중에 이렇게 말했다. 그는 5개월 뒤 유명을 달리했다. 서른셋이었고, 오토바이는 사지 못했다. 2016년 김광석 20주기 기념전엔 할리데이비슨이 그의 유품과 함께 전시됐다. 그의 ‘로망’을 기억한 팬이 대여해준 것이었다.》
중장년들의 버킷리스트 단골손님이 오토바이(마니아들은 ‘바이크’라 칭한다), 그중에서도 ‘아메리칸 크루즈’로 분류되는 최중량급 할리데이비슨이다. 할리데이비슨 2005년형 ‘CVO 스트리트 글라이드’(1690cc, 2017년형은 5550만 원)를 타고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나영호 씨(60). 꼿꼿한 허리에 군살도 없어 헬멧과 선글라스를 벗고서야 얼굴을 알아봤다.
“수영, 테니스, 마라톤 다 해봤지만 바이크만 한 게 없어요. 다른 건 승부욕에 빠지고 기록에 집착하죠. 지면 속상하잖아요. 바이크를 타면 다 잊게 됩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으니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거지요. 벚꽃잎이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고 낙엽들이 푸드덕 날아올라요. 코끝 파고드는 풀 내음에다…. 차 안에 갇혀 있으면 절대 못 느끼지요.”
고교 졸업 후 서울 광장시장에서 의류도매업으로 잔뼈가 굵었다. 점원 노릇만 20년. 배달 오토바이로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다 번쩍번쩍 광택 도는 할리데이비슨을 보면 ‘나도 돈 많이 벌어서…’라며 입맛을 다셨다. 훗날, 돈 많이 벌어서 오토바이 얘길 꺼내니 아내가 “먹고살 만하다고 묏자리 찾냐”며 펄쩍 뛰었다. 그러던 아내가 요즘은 “못 가도 1년에 두 번, 새싹 돋을 때랑 단풍 들 무렵엔 그룹 라이딩 때 뒷좌석에 태워 달라”며 성화라고 한다.
서울 당산동에서 삼겹살집을 하는 최호석 씨(53)는 저녁에만 문을 연다. 별미 김치국밥과 냉면이 점심 메뉴로도 인기를 끌 법하지만 낮 시간에 종종 즐기는 라이딩을 포기할 수 없다.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헌병대에 입대하려고 학창시절 서둘러 면허를 땄지만 키가 기준에 미달했다. 혼다 오토바이를 타며 아쉬움을 달래다 1993년 장사를 시작하면서 그나마도 접었다. 가게가 웬만큼 자리를 잡은 2007년 할리족(族) 대열에 합류했다. 혼다를 탈 때와는 사뭇 달랐다.
“할리는 효율, 기능, 속도, 내구성 등에서 혼다나 BMW의 ‘가성비’에 못 미친다. 저회전 엔진 탓에 시속 80~100km의 저속 주행에 만족해야 하고, 코너링할 때 넘어질 가능성을 줄여주는 첨단기능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기계가 알아서 해주지 않고 라이더의 간섭과 관여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게 할리의 매력이다. 쉽게 다루긴 어려워도 일단 능숙해지면 ‘손맛’을 제대로 느낀다. 아날로그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
할리족들은 엔진 비효율로 인한 할리의 ‘고속불가’를 오히려 장점으로 입소문 낼 만큼 브랜드 충성도가 높다. “할리를 타면 경치가 보이고 혼다나 BMW를 타면 도로가 보인다”고 한다. 할리는 저속으로 달리며 주변 풍광을 만끽하지만 고속 오토바이는 도로 위의 위험요소에 시선을 집중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다는 얘기다. 속도가 느리다 보니 수시로 차선을 넘나드는 ‘칼치기’를 못해 그만큼 안전하며, 수십 대가 무리지어 달리는 할리족 특유의 그룹 라이딩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최호석 씨는 “중장년층이 할리를 많이 타는 건 바이크 가격이 비싼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탈 수 있다는 이유가 더 크다(더구나 자동차 운전자들이 고가의 할리를 알아서 피해 간다!)”고 했다.
민항기 조종사 K 씨(53)는 ‘탈 것 마니아’다. 항공기를 이·착륙시킬 때의 쾌감 때문에 비행이 있는 날은 출근길이 여행자처럼 설렌다. 직접 개조한 SUV로 드라이브를 즐기고, 날씨가 적당한 날엔 요트에 몸을 싣는다. 결혼 후 10년을 아내에게 졸라댄 끝에 2005년부터 할리를 탄다. ‘비교분석’을 청하자 그는 주저 없이 “비행기는 삶, 요트와 SUV는 취미, 할리는 삶이자 취미”라고 답했다.
“할리는 성능과 스피드가 아니라 문화와 스타일로 탄다. 말발굽 소리 같은 중저음 엔진 사운드와 단단한 북소리 같은 배기음, 말에 올라탄 듯 몸 전체로 전해지는 거친 진동, 등자를 밟고 오르내리는 느낌의 디자인에서 서부 개척시대 카우보이들의 야성이 배어난다.”
할리는 구형 공랭식 2기통 엔진을 기본으로 장착해 소음과 진동이 크다. 다른 브랜드들은 첨단기술로 소음과 진동을 줄이고 있지만 할리는 요지부동. 한 발 더 나아가 이걸 세일즈 포인트로 내세운다. 자체 튜닝 회사를 갖추고 고객의 기호대로 머플러 등을 튜닝해 강렬한 소리와 떨림을 만들어낸다. 법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엔진을 제외한 모든 부품의 튜닝과 옵션이 가능하다. 김광석처럼 다리가 안 닿을까 걱정이라면 안장을 깊게 파줄 수도 있다. K 씨는 “처음부터 주문형 바이크를 인도받기도 하고, 타면서 조금씩 바꿔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나만의 취향이 반영된, 세계에 단 1대밖에 없는 바이크를 탈 수 있다. 그래서 할리는 자유, 개성, 저항의 표현이다”고 말한다.
나영호 씨는 할리를 부(富)의 과시로 보는 시각을 단호하게 반박했다.
“초기 비용은 좀 들지만 장비를 웬만큼 갖추고 나면 큰돈 들 일이 없다. 서울에서 양평 다녀오는 데 기름값, 점심값 3만 원이면 재미있게 하루 놀다 온다. 바이크는 대리운전도 안 되니 술도 못 마신다. 비싼 음식점도, 술집도 발길 다 끊게 된다.”
로망을 로망으로만 간직할 것인가, 현실로 끄집어낼 것인가…. 고민 중인 중장년 ‘예비 라이더’들이라면 마크 트웨인의 벼락같은 경구에 눈이 번쩍 뜨일지도 모른다.
“20년 후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로 인해 더 실망할 것이다…탐험하라, 꿈꾸라, 발견하라.”
▼ 할리가 처음이라면 ▼ 배기량 125cc 이상의 오토바이를 타려면 2종 소형면허가 필요하다. 자동차운전면허 보유자도 굴절, 곡선, 좁은 길, 연속진로전환 코스 등으로 이뤄진 까다로운 기능시험을 통과해야 이 면허를 딸 수 있다.
경험 많은 라이더들은 “전문학원에서 연습용 오토바이로 충분히 연수를 받은 뒤 면허를 따라”고 조언한다. 일단 면허를 따면 오토바이부터 사고 싶어진다는 것. 실제 주행에서는 코너링, 변속, 급제동, 오르막 정차, 안전하게 넘어지기, 넘어진 오토바이 세우기 등이 중요한데, 면허시험엔 이런 기능을 테스트하는 과정이 없어 면허를 땄다고 곧장 도로에 나섰다간 큰코다칠 수 있다. 조종사 K 씨는 “나도 10년 전에 타던 실력만 믿고 할리를 몰다 코너링하면서 핸들 조작 미숙으로 넘어진 적이 있다”며 “아차 싶어서 바로 학원에 등록해 방어운전 능력을 익혔다. 라이더가 바이크에 끌려다니는 수준이면 언젠가는 사고가 난다”고 했다.
할리데이비슨 관계자는 입문자에게 추천할 만한 엔트리급 모델로 단거리·시내 주행 위주라면 ‘스트리트 750’(750cc, 1100만 원)과 ‘아이언 883’(883cc, 1770만 원), 중·장거리 주행 위주일 경우 ‘팻보이’(1690cc, 2700만 원)를 꼽았다. 중고 차량을 택하면 가격 부담을 신차의 60%대로 낮출 수 있다.
여기에 사고 시 사람과 차체를 보호하는 엔진가드 등 필수적인 액세서리 비용(오토바이 값의 약 10%)이 추가된다. 재킷, 헬멧, 부츠, 청바지, 장갑 등 기본적인 복장은 여름용 1세트를 갖추는 데 100만 원 안팎이 든다. 복장은 안전과 직결되기에 튜닝보다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쉽게 벗겨지지 않아야 하며, 넘어졌을 때 아스팔트에 잘 미끄러져 충격을 덜어주는 가죽 소재 제품이 좋다. 이형삼 전문기자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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