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남자의 계절이어서만이 아니다. 홀로 배낭을 메고 트레킹을 떠나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육아, 남편 뒷바라지의 부담에서 벗어난 중장년 여성들이 즐기는 ‘여자들끼리의 여행’과는 좀 다르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아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을 꿈꾼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은 홀로 여행을 가고 싶어한다. 그 이유를 묻거나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재미’ ‘즐거움’만을 위해서가 아닌, 중년남자의 홀로 여행… 그 여행지의 로망으로 꼽히는 것이 해외 트레킹이다. 그들은 더 젊었던 시절,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케이블카나 관광버스로 올랐던 해외 유명산속으로, 어느덧 희끗희끗해진 머리에 등산모를 눌러쓰고 혼자 깊이 깊이 걸어 들어간다.》
몽블랑의 광대한 초원, 중국 황산의 4절(絶)… 온몸으로 느낀 대자연의 속살
몽블랑 트레킹 4일째.
아침 일찍 산장 밖으로 나가자 눈 덮인 그랑조라스와 몽블랑의 봉우리가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들어 눈부신 풍광을 연출했다.
이런 장관에 압도된 탓일까. 초원지대를 3시간 가량 걸어 사핀 고개까지 오르막길을 오르면서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여기서 다시 오른쪽 급경사 길을 30분 가량 더 오르자 눈 앞에 펼쳐진 광대한 초원이 숨을 멎게 했다. 야생화까지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몽블랑 트레킹(TMB) 구간 중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몽데라 삭스 능선이다. 이 능선 만으로도 TMB를 왜 트레킹의 백미라고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TMB는 알프스에 자리잡은 유럽 최고봉 몽블랑(4807m)을 가운데 두고 이를 한 바퀴 도는 170km 가량의 코스다. 완주에는 13일 정도 걸린다.
트레킹 전문 여행사를 통해 함께 모인 우리 일행 7명은 프랑스 샤모니로 가서 거기서 1박을 한 다음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시작했다. 몽블랑 등정의 전진 기지인 샤모니는 고즈넉한 도시였다. 곳곳에 깔끔하고 아담한 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시내 한 가운데로 흐르는 개울물은 온통 황토 빛이었다.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 흐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샤모니에서 출발해 발므 고개를 지나 스위스 지역으로, 페레 고개를 거쳐 이탈리아 영토로, 다시 센 고개를 넘어 샤모니로 되돌아오는 130여 km를 걸었다. 9일 간의 일정이었다. 밤에는 호텔처럼 깨끗한 산장의 숙소에서 보냈지만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짐은 다음날 묵을 산장으로 옮겨주는 회사에 맡겼다.
트레킹 내내 어디서나 우뚝 솟은 설산을 볼 수 있고, 야생화와 운무, 빙하지대를 구경할 수 있는 꿈같은 길이었다. 때로는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 떼를 만날 수 있었다. 방목으로 소를 키울 수 있는 자연 환경이 부러웠다. 다만 일정이 짧아 모테 산장에서 본옴므 산장으로 이어지는 미아지 호수와 푸어 고개를 가지 못해 아쉬웠다.
TMB는 잘 닦아 놓은 오솔길을 따라 걷기 때문에 위험 요소는 없다. 심지어 허리가 구부러진 탓에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언덕길을 오르는 90세 안팎의 유럽인 할머니도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손을 붙잡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가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울긋불긋 등산복을 입은 우리 일행과는 다른 수수한 차림새도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만만히 봐서는 곤란하다. 해발 1400m에서 시작해 해발고도를 1000m이상 오르내려야 하는 여정이었다. 다행히 나는 주말마다 등산을 열심히 하면서 체력을 길러온 덕분에 전혀 힘들지 않았다. 주위 경치도 충분히 감상하고, 사진도 찍는 여유를 즐기려면 평소 걷기 훈련을 꾸준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사실 몽블랑은 유럽 패키지 관광의 인기있는 코스다. 하지만 다들 케이블카로 올라 기념사진 찍고 내려와 버스로 다음 관광지로 이동하는 짧은 방문이다. 나도 케이블카를 타고 에귀뒤미디 봉 전망대에 올라봤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케이블카인 데다 몽블랑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어 단순 관광 차원에서는 꼭 한번 가볼 만한 절경이다. 그러나 땀 흘리며 걸으면서 인내심의 한계도 시험해볼 수 있는 트레킹의 매력과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TMB는 2014년 시작한 해외 트레킹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나홀로 트레킹은 50대 가장으로서 두 어깨 위에 짊어진 짐을 벗어던지고 잠시나마 나를 찾아 떠나는 시간이었다. 부부라고 하더라도 각자의 생활 영역이 있음을 인정해 흔쾌히 ‘비자’를 발급해 주는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첫 시작은 2014년 4박5일 간의 일본 북알프스 트레킹이었다. 3000m가 넘는 고봉이 줄지어 서 있고, 한 여름인데도 정상에는 만년설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2015년엔 러시아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위에 떠 있는 알혼섬으로 들어갔다. 바이칼 호수에 발을 담그고 바다와도 같은 끝없는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일상에 지친 영혼을 정화시켰다.
지난해 여름엔 4박5일 동안 중국 황산을 제대로 감상했다. 황산 4절(絶)이라는 기이한 형상의 소나무, 기암괴석, 운해, 온천을 가슴 속에 담아 왔다. 날씨가 변화무쌍해 4절을 한꺼번에 감상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데 행운이 따라서 황산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주변에선 흔히 묻는다. 몽블랑이나 황산과 비교해 한국 산은 어떠냐고. 규모나 풍경에서 우리나라 산이 훨씬 못하지 않느냐는 답을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다. 그럴 때마다 자신 있게 대답한다. 우리 산은 그나름대로 정취가 있고, 아기자기하며, 외국 산과 달리 계절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비교 대상이 아니라 각각 다른 맛을 지녔다는 얘기다.
고교 동창생 등 마음에 맞는 친구와 함께 트레킹을 하는 것도 좋지만 ‘나 홀로’ 트레킹도 나쁘지 않다. TMB 과정에서도 혼자 온 사람을 여럿 만났다. 대부분 외국인들이었다. 단체로 산행을 하다보면 일정이 획일적이고, 다른 사람과 보폭을 맞춰야 하므로 심리적으로 쫓기게 된다.
해외 트레킹은 광대한 초원과 설산에서 받아온 기운을 주변 사람에게 전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가족이나 사무실 직원들도 해외 트레킹 직후의 활기찬 내 모습이 좋다고들 한다. 내년에는 이탈리아 밀라노 지역의 돌로미티를 계획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악 경관을 연출하는 곳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글·사진 김정범 법무법인 민우 변호사
국내의 트레킹 역사는 제주 올레길 성공으로 대중화
국내에서 해외 트레킹이 대중화한 것은 2000년대 후반 제주 올레길의 성공 덕분이다. 2007년 9월 첫 코스를 개설한 제주 올레길은 이후 전국적인 걷기 여행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자연스럽게 해외의 아름다운 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트레킹은 전문적인 장비나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걷기 여행이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등산과 구별하기도 하지만 트레킹으로 정상까지 안내하는 경우도 있다.
여행 작가 진우석 씨는 “트레킹은 말 그대로 온전히 걸어 다녀야 하기 때문에 대상 지역의 속살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최대 매력”이라고 말했다. 몽블랑, 그랜드캐년, 록키마운틴 등 기존에 가이드를 따라 몇시간 방문하고 떠났던 해외의 장엄한 풍경속으로 직접 들어가 몸으로 자연을 느낀다는 점에서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장년층의 로망이 되어가고 있다.
국내에 해외 트레킹을 본격 소개한 여행사로 유명한 혜초여행사 이진영 상무는 “해외트레킹 여행상품을 주로 이용하는 계층은 중장년의 베이비붐 세대”라고 말했다. 기업의 등산 모임 등에서 단체로 찾는 경우도 있으나 아직은 소수다. 전문가들은 해외 트레킹 인구가 10만 명은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진우석 씨는 “최근 들어 그동안 유럽인들만 다녔던 미얀마 고산마을 껄로에서 인레 호수까지의 60㎞ 코스에도 한국인이 나타나기 시작한 점에 비춰 상당한 팬층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비용은 코스 및 일정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한국인이 즐겨 찾는 유럽 알프스 지역은 400만~600만 원으로, 각각 9, 10, 11일짜리 프로그램이 있다. 네팔의 히말라야산맥 지역은 200만~300만 원이다. 윤영호 전문기자 yyo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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