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표절이 예술이 되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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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서점의 한국소설 코너.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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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자이며 중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중세 서적들을 읽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세상의 모든 책은 끊임없이 다른 책을 참조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미 말해진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마치 직물(織物)을 짜듯 서로 다른 텍스트들을 짜깁기하고, 과거 책들의 인용문들을 조합하여 소설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책은 그야말로 책으로 만들어진 책일 것이다. 소설 ‘장미의 이름’은 이렇게 탄생했다. 수도원의 출입구 묘사는 중세의 장중한 수사법을 모방했고, 아드소의 일인칭 기술은 ‘파우스트 박사’에 나오는 ‘암시적 간과법’을 차용했으며, 본관 주방에서 벌어지는 아드소와 집시 처녀의 정사 장면은 구약성서의 ‘아가(雅歌)’를 그대로 끼워 넣었다.

이것이 소위 ‘짜깁기’ ‘절충주의’ ‘패스티시’ 등으로 불리는 포스트모던 미학의 기법이다. 20세기 후반에 광풍처럼 몰아쳤지만 실은 1960년대에 이미 정교한 이론이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롤랑 바르트 등에 의해 마련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 그것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가장 단순하게는, 하나의 텍스트 안에 다른 텍스트가 인용문 혹은 언급의 형태로 들어 있는 경우를 말한다. 이때 텍스트란 하나의 단어일 수도 있고, 하나의 문장이나 문단일 수도 있으며, 더 넓게는 한 권의 책일 수도 있다. 다른 문학 텍스트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 혹은 영화 같은 다른 기호체계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문화 일반으로까지 확대될 수도 있다.

크리스테바는 이 용어를 20세기 초 소련의 문학이론가인 바흐친에게서 빌려 왔다. 이 이론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세상 모든 것이 과거에 이미 존재해 있던 것을 이리저리 다시 조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문학 텍스트 역시 어느 한 작가의 독창성이나 특수성에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종전의 다른 모든 텍스트를 받아들여 변형시킨 결과이거나 인용구들의 모자이크다. 그렇다면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로 순수한 창작물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모방이며 습득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표절 행위나 크게 다를 바 없다. 호메로스나 세르반테스도 모두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롤리타’의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창작 행위를 일종의 표절 행위로 간주한 대표적 작가이다. 보르헤스는 돈키호테를 글자 그대로 다시 베껴 쓴 가상의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삼아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과 너무나 똑같아,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신경숙의 변명이 설득력이 떨어지고 금세 조롱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는 두 번째 사과문을 보고는 정말로 어이가 없어진다. 표절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표절이라는 것을 당당히 밝혀야 하는데, 끝내 표절임을 부정하는 것은 글쓰기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부족하다는 반증으로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고작 한 문단의 인용이 과연 작품 전체를 훼손하는지, 그리고 엄격한 저작권법 적용하듯이 문학이나 인문학 저작을 재단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일반 독자들이 작가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전문가 집단인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매우 반지성적이다. 또 하나의 변종 ‘친일파 신드롬’이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표절#예술#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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