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자는 백성들을 먼저 잘살게 하고 나서 가르치라는 말이다. 선부후교(先富後敎)라는 말로도 알려져 있다.
‘논어’ 자로 편에 보면 공자가 위(衛)나라에 갈 때 제자 염유(염有)가 모셨다. 인구도 많아 감탄하는 공자에게 염유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냐고 여쭙자, “그들을 잘살게 해주어 한다(富之)”고 했다. 잘살게 되면 또 무엇을 하느냐고 다시 여쭈니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敎之)”고 했다. 사실 공자는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는 것은 어렵지만, 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은 것은 쉽다(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논어 헌문 편)”고 하면서 ‘貧’과 ‘富’를 대비시켰다. 그러면서도 “가난하면서도 즐거움으로 삼고, 부유하면서도 예의를 좋아하는 것(貧而樂 富而好禮·논어 학이 편)”을 더 강조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을 재물과 연관 없는 존재로 묘사하기를 좋아했다. “의롭지 못하고 잘살고 귀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논어 술이 편)”며 애써 ‘富’ 자체를 외면하고자 한 것도 사실이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그것을 베개로 삼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추구한 공자였기에 그렇다. “부유함과 귀함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그것이 정당하게 얻은 것이 아니면 누려서는 안 된다(富與貴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논어 이인 편)”고 富貴를 본능의 문제로 보면서도 道에 입각해서 추구해야 한다는 잣대를 들이댔다.
공자는 “가르쳐 주지도 않고 죽이는 것을 잔인하다 한다(不敎而殺謂之虐·논어 요왈 편)”고 하면서 사교(四敎), 즉 네 가지 가르침을 주장했다. 문행충신(文行忠信·문학 덕행 충심 성의) 등이 그것이다. 물론 가르침의 원칙은 있었다. 스승을 뵐 때 최소한의 예절을 갖추어야 하며, (배울 때)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발휘하도록 말해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비不發·논어 술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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