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가치보다는 미래의 보물이란 뜻으로 ‘보화난수(寶貨難수)’와 유사하다. 사기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에 의하면 이렇다. 전국시대 말 위(衛)나라의 거상(巨商) 여불위가 어느 날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 머물고 있다가 우연히 진(秦)나라 소왕의 손자 자초(子楚)가 인질로 잡혀 와 있는 것을 보았다. 사연을 알아보니 이러했다. 자초의 아버지 안국군(安國君)에게는 아들 20여 명이 있었다. 안국군에게는 화양부인(華陽夫人)이란 정부인이 있었으나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자초는 안국군의 첩 하희(夏姬)의 아들이었는데 그의 생모는 안국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입지(立地)가 부족한 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나라는 인질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조나라를 자주 공격했기 때문에 조나라 역시 자초를 전혀 예우하지 않았다. 조나라에서 자초의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여불위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으나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기화가거’라고 말한 것이다. 여불위는 자초를 찾아가 소왕은 이미 늙었고 태자 안국군이 화양부인을 총애하는 현실을 짚어주었다. 그리고 자초가 20여 명이나 되는 형제 사이에서 서열이 밀린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고는 우선 화양부인의 양자로 들어갈 수 있게 하고 나중에 후사를 이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은밀한 제안을 했다.
여불위의 이런 제안에 자초는 머리를 숙이며 “당신의 계책대로 된다면 진나라를 그대와 함께 나누어 갖도록 하겠소”라고 다짐한다. 여불위는 한 술 더 떠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첩을 자초에게 주어 훗날을 기약하고자 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자초는 태자로 책봉돼 왕위에 오르게 됐다. 자초가 불과 3년 만에 죽자 여불위의 아들 영정(영政)이 대를 이어 진왕이 됐다. 그가 39세에 천하를 통일하고 중국 최초의 황제가 된 진시황(秦始皇)이다. 여불위 역시 진나라의 상국(相國)이 돼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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