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했더라도 다시 세력을 규합해 쳐들어온다는 의미로 어떤 일이든 실패하더라도 힘을 쌓아 일에 착수하는 것을 말한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제오강정(題烏江亭)’이란 시에서 노래한 시구에서 나온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전쟁에서 기약할 수 없는데/치욕을 안고 견디는 것이 사나이다/강동의 자제들 중에는 인재가 많으니/흙을 말아 올려 다시 오는 날을 아직 알지 못한다(勝敗兵家不可期, 包着忍恥是男兒, 江東子弟才俊多, 捲土重來未不知). 두목의 푸념은 권토중래하지 못하고 단 한 번의 패배에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진 항우의 심약한 모습에 대한 서글픈 감회의 표출인 것이다.
사기 ‘항우본기’에 따르면 야심 많고 세상사에 거침없던 항우는 이름이 항적(項籍)이다. 항우가 그의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당시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하고 절강(浙江)을 건널 때,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는 “저자의 자리를 내가 대신하리라”고 했던 기백의 소유자였다. 항우는 키가 8척이 넘고 힘은 정(鼎)을 들어 올릴 만했으며 재기(才氣)가 범상치 않았다. 그런 그가 초나라 지역을 거의 장악한 것은 대세였다. 그러는 사이 건달 출신 유방(劉邦)이 북방을 터전으로 하여 암중모색(暗中摸索)하면서 그와의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항우가 우미인(虞美人)과 술에 빠져든 사이 유방은 7년여의 패배를 설욕할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결국 기원전 202년 겨울 유방은 항우를 해하에서 포위하고는 항우를 사면초가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간다.
포기가 빨랐던 항우는 주변의 만류에도 최후까지 지나친 만용을 부리다 31세의 나이로 최후를 마감한다. 사마천은 항우가 불과 28명의 기병을 이끌고 관영이 지휘하는 5000명의 정예병과 대적하면서 항우 혼자 수백 명을 죽이는 장면, 자신의 머리에 내걸린 현상금을 차지하려는 자들을 향해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장면 설정을 통해 항우의 패망이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닌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 부른 역사적 필연임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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