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할 방법(方法)이 없는 최악(最惡)의 상태(狀態)를 비유하는 말로 ‘참새를 그물질하고 땅을 파 쥐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른다’는 의미다. 당(唐)나라 천보(天寶) 말기 사람 장순은 충직한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고 담력 또한 남달랐다.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그는 허원일(許遠一)이라는 자와 함께 수양(휴陽)의 성을 수비하고 있었다. 757년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가 대장군 윤자기(尹子奇)를 보내 수양성을 공격했다. 장순을 따라 성을 지키던 군사는 겨우 3000여 명에 불과해 10만 명이 넘는 반란군을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순은 비록 수적으로는 열세를 면치 못했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성을 지키려 했다. 자신만만한 반란군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성을 공격하는가 하면 온갖 회유로 항복을 요구했다.
반란군에 포위된 지 며칠도 안 돼 성 안에 비축해 놓은 군량미는 바닥을 드러냈고 군량미 공급도 되지 않아 점점 굶주림에 허덕이게 됐다. 허기에 지친 병사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씹어 먹기도 하고,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아먹기도 했으며, 땅을 파서 쥐를 잡아먹기도 했다. 장순은 지휘관의 입장에서 자식 같은 병사들의 몸부림을 안타깝게 여겨 자기 아내를 죽여 국을 끓여서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병사들은 갑옷과 쇠뇌를 삶아 먹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화돼 갔고 더는 성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됐다. 마침내 장순은 반란군의 포로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장순이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항복을 요구하는 자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그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장순의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죽음과 바꾼 그의 충성심에 새삼 고개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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