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재능을 지녀 제왕을 보좌할 만한 큰 그릇이라는 의미로, 정사 삼국지 순욱전(荀彧傳)에 나온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난 순욱은 나이 50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조조의 창업을 도운 핵심 참모다. 그는 북방의 장수 원소(袁紹)에 의해 상빈(上賓)의 예우를 받았다. 동생 순심(荀諶)도 원소의 수하에 들어갔으나 순욱은 원소를 “결국 큰일을 이루지 못할(終不能成大事)”(순욱전) 사람으로 단정하고는 나이 스물아홉에 과감히 그를 버리고 조조에게로 와 ‘나의 장자방(吾之子房·한나라 고조 유방의 공신)’이라는 극찬을 들었다.
동탁이 천하를 풍미할 때 그는 동탁의 포학성과 무능함을 예견하고 조조를 따라 창업에 헌신해 천하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면서 조조의 도겸(陶謙) 정벌에도 동행했다. 곽가와 정욱이라는 모사를 조조에게 천거하는 안목을 두루 선보였다. 소신과 명복을 갖춘 그는 20여 년 동안 조조의 심복이었다. 더구나 조조의 절대적 열세라고 분석된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원소의 10분의 1 정도였던, 1만 명도 안 되는 인력으로 대항한 것이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식량도 떨어지는 위기상황에서 철군하려는 조조에게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면 반드시 짓밟히게 되니 지금이야말로 천하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기입니다. 더구나 원소는 평범한 일개 우두머리에 불과하므로 인재를 모아도 쓸 줄은 모릅니다”(순욱전)라고 하면서 설득했다. 순욱은 조조의 인사정책의 우위성인 공정함, 결단력, 임기응변, 신상필벌, 인재예우 등이야말로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결국 조조는 대승해 천하 경영의 초석을 닦는다.
그러면서도 순욱은 조조의 작위를 국공(國公)으로 추대하자는 동소(董昭) 등에게 신하의 명분을 강조하면서 반대해 조조와의 소원한 관계를 감수했다. 조조가 막내 조식(曹植)을 후계자로 선정하려 했을 때도 적장자 원칙을 내세우며 설득해 조비(曹丕)에게로 원만한 승계를 유도한 소신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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