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후원국 소련의 체제 전환으로 경제위기에 빠진 쿠바의 카스트로 정부가 제한적이지만 신속한 개혁과 개방을 통해 역설적으로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특히 중앙집권적인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수선이 카스트로 형제와 공산당 독재 정치의 개혁과 병행되었다는 점은 오늘날 북한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1989년에 시작해 대략 1994년에 끝나는 한 사이클을 10단계로 나눠보면 이렇다.
①최고지도자가 위기임을 인식(1989년 7월) ②위기임을 엘리트와 인민들에게 천명(1989년 12월) ③관광 등 대외부문을 제한적으로 개방(1990년 1월) ④위기 극복을 위한 인민들의 의견을 수렴(1990년 3월) ⑤공산당 개혁(1990년 5월) ⑥당 대회를 열어 정치 경제 개혁 조치 입안(1991년 10월) ⑦부패한 당 간부들을 숙청(1992년 6월) ⑧헌법을 개정해 정치제도를 개혁(1992년 7월) ⑨분권화 경제 개혁 조치 단행(1993년) ⑩시장화 개혁 조치 단행(1994년).
생산성을 높이고 부족한 달러를 확보하려는 노력과 함께 비대해진 공산당을 개혁하고 당 간부들을 숙청하는 이유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최고 정치기구인 공산당은 경제가 위기에 빠져 자본주의적 시장 메커니즘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작금의 사태에 당연히 먼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읍참(泣斬) 공산당’을 통해 자본주의적 개혁과 개방에 따르는 내부 분란을 막자는 것이다.
헌법의 개정은 공산당 대회의 결의를 제도화하는 핵심적인 과정이다. 1992년 7월 개정된 쿠바 헌법은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고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했다. 또 전국과 주 단위 대표 선거에 비밀 직접 선거를 허용해 국가 정책 결정에 대한 대중 참여를 확대했다. 이렇게 시작된 쿠바 정치의 개혁은 2018년 4월 동생 라울이 국가평의회 의장(행정수반)직에서 물러나 카스트로 형제 독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1990년대 초 똑같은 이유로 ‘고난의 행군’이라는 이름의 경제위기에 빠진 북한은 쿠바와 비교할 때 더딘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쿠바보다 정치 소통 능력이 떨어지고 권력에 따른 불평등이 심했던 탓에, 북한 최고지도부는 위기의 인식부터 뒤처지기 시작했다. 국가의 대응이 늦어지는 사이 수십만∼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 도입은 쿠바보다 10년이 늦었고 이에 앞서야 할 7차 노동당대회는 2016년 5월에야 열려 25년 뒤처졌다.
김정은의 경제 개혁 브랜드인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는 올해 4월 개정된 헌법 33조에 비로소 삽입됐다. 32조에 삽입된 ‘실리를 보장하는 원칙을 확고히 견지한다’는 내용은 시장 활동을 보장한다는 의미라고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설명했다. 아버지 김정일이 시장과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오락가락한 것과는 달리 김정은은 2009년 11월 화폐개혁 실패 이후 시장 메커니즘의 확대를 점진적으로 제도화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문제는 정치다. 1980년 이후 36년 만에 열린 당 대회는 현실 사회주의의 기본인 공산당 집단지도체제의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김일성에서 시작된 김씨 일가 세습 독재를 정당화하고 3대인 김정은의 무소불위 개인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거수기였다. 지난달 29일 최고인민회의 제2차 회의에서 올해 두 번째 개정된 헌법 역시 국무위원장 김정은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그쳤다.
3대를 이은 정치와 경제 실정을 반성하기는커녕 개인 독재 절대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강화하려는 행태는 위기 이후 북한이 쿠바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김정은과 노동당이 사반세기 전 쿠바 지도부가 했던 것처럼 인민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읍참’하는 모습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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