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11월호/新東亞 창간 84주년 특별기획 | 2·0·4·5 광복 100년 대한민국]
필요와 수요가 없는 건 모두 사라졌다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이라며 호주로 이민을 한다. “접시 닦으며 살아도 호주가 좋다. 사람 대접을 받으니까”라며 호주에 정착한 계나가 2045년 한국을 다시 찾는다면, 그녀 눈에 비친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계나 또래의 여성 소설가가 이런 전제로 단편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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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만드는지 물었을 때, 계나는 빙긋 웃으며 가르쳐주지 않았다. 계나는 자르지 않은 생닭의 내장과 불순물을 맨손으로 손질하고 있었다. 우리와 가족이 된 후로 그녀는 가끔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하듯 요리를 만들었다. 요리사 남편이 죽고 까다로운 입맛만 남았다고, 그래서 요리실력이 늘었다고, 계나는 자주 농담했다.
딸아이는 의자 위에 올라가 계나의 요리를 구경했다. 아이는 계나의 모든 말과 움직임에 매번 감탄했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어린 여자아이의 눈에 계나는 그 아이가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머나먼 세계의 사람이었다. 계나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억양과 늙은 사람이 가지게 되는 뻑뻑한 거죽의 감촉을 아이는 신비롭게 여겼다. 할머니가 아니라, 놀라울 만큼 부드러운 털을 가진 강아지나 어디로 날아갈지 짐작할 수 없는 파랑새가 생긴 것처럼 즐거워했다.
계나가 만든 음식은 닭을 통째로 오븐에 구워낸 바비큐 요리였다. 계나는 그것을 먹기 좋게 잘라 제일 먼저 딸아이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그녀는 아이를 늘 사랑스러워했다. 남편과 내 접시에도 닭고기를 올려주며, 이제 맛을 보라고, 우아하게 말했다. 아직 60대인 그녀는 여전히 밝은 피부와 대체로 검은 머리칼을 가졌다. 몸매도 별로 흐트러지지 않아 맵시가 괜찮았다. 내가 맛이 아주 좋다고 하자 계나가 말했다.
▼ 이건 칠면조 맛을 흉내 낸 거야. 칠면조를 먹어본 적 있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칠면조는 내가 딸아이만큼 어릴 때 멸종했다. 칠면조가 아직 이 땅에 살아 있을 때에도 딱히 먹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 칠면조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멸종해버렸지. 병이 돈다 싶더니 수천만 마리가 괴사하고 몇 년 만에 조류학회에서 공식 멸종을 선언했어. 순식간이었지. 칠면조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추수감사절도 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우리 때는 자주 농담했단다.
남편은 이미 계나에게 수도 없이 들은 농담이라고 속삭여 나를 웃겼다.
▼ 그냥 닭고기 맛인데요?
딸아이가 입 안의 살코기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 아니야. 이건 칠면조와 아주 흡사한 맛이란다.
아이 입가에 묻은 번들거리는 기름을 닦아주며 계나가 말했다.
▼ 하지만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것도 당연하지. 칠면조가 멸종한 건 어쩌면 닭이 칠면조를 대신할 수 있어서니까. 굳이 필요한 종(種)이었다면 치료제든 백신이든 어떻게든 만들었을 거야.
딸아이는 골똘한 표정으로 고기를 씹으며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새의 맛을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칠면조와 공존한 적 없는 아이에게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 물론 추수감사절은 한국의 명절이 아니니까 상관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계나가 칠면조 맛 닭고기를 음미하며 말했다. 남편과 나는 뜨악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딸아이가 까르륵 웃으며 말했다.
▼ 할머니 한국은요,
할머니에게 물을 한잔 가져다드리라고, 내가 재빠르게 말했다. 아이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물잔을 가지러 갔다. 남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2
계나의 상태가 나빠진 것을 처음 안 건 나였다. 나는 그녀의 예순 번째 생일파티를 상의하기 위해 지구 남반구로 전화를 걸었다.
▼ 환갑이라니. 내가 말이니?
계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 아가. 너만 한 나이일 때 나는 쉰쯤에 은퇴하고 제주도에서 10년쯤 살다가 예순에 죽고 싶었어.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직접 만든 반찬으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 거야. 해안선을 보면서 달리고 수영과 몇 가지 악기를 배우며 사는 거지. 상추도 키울 생각이었어. 물을 주면 열매를 맺는 정직하고 부드러운 풀들 말이야. 그렇게 살다가 예순이 되면 자살하는 삶을 꿈꿨어. 그런데 내가 벌써 예순이라니, 우습지 않니? 감기에도 벌벌 떠는 할머니가 되리란 걸 그때는 짐작도 하지 못했지.
꿈 한번 쿨하네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계나의 삶이 움직여온 방식을 존중하고 있었다.
▼ 그런데 정말 웃기는 건, 내가 단 한 번도 제주도에 가지 못했다는 거야. 세상에서 제일 큰 섬에서 30년을 넘게 살았는데, 한국의 작은 섬이 뭐라고,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아직까지 그 땅을 밟아보지도 못했어.
거긴 이제 한국 땅이 아니지 않냐고, 그래도 정 마음이 쓰이면 이번 생일에 그 섬에 가자고, 해안선을 보고 수영을 하고 상추도 먹고 오자고, 나는 계나를 타일렀다.
▼ 한국 땅이 아니라니?
계나는 재미있어하는 투로 물었다.
▼ 그럼 거긴 누구 땅이니?
델몬트가 샀잖아요, 하고 대답하는 동시에 나는 이상한 직감에 휩싸였다. 그건 거의 확신에 가까운 무서운 예감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계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 과일주스 브랜드를 말하는 거니? 한국 땅을 델몬트가 샀다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거실에서는 남편과 딸아이가 하얗고 단단한 복숭아 조각을 베어 먹고 있었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는 계나의 직계 가족들에게, 이 일을 어떤 방식으로 전해야 할지 아득해졌다. 그런 시간 속에서도 계나는 천진하게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계나에게, 결국 이렇게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이제 없잖아요.
계나는 깜짝 놀라다가, 몇 번 되묻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 아 그랬지. 맞아. 이제 한국은 없지.
힘없이 수긍했다.
3
한국이란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건 5년 전이지만, 이미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한 조각의 땅도 남김없이 팔린 상태였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너덜너덜한 주식처럼 팔려나갔고, 결국 모조리 팔렸다.
처음 시작은 그리스의 파산이었다. 2020년대에 기상이변으로 생겨난 새로운 재난 뇌운이 그리스의 복잡한 산맥을 타고 내려와 수많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번개의 신 제우스를 가진 나라에 그건 의미심장한 멸망의 징조였다. 재정 상태가 나빴던 그리스는 가장 피해가 적은 아테네를 팔아야 했다. 정확히는 디즈니가 정식으로 그리스 정부에 아테네 인계를 제안했다. 대지 매매가 아니라 모든 권한을 포함한 영토 매매였다. 당시에 외신들은 그 상황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머지않아 놀라운 광경을 마주했다. 결과적으로 아테네 인수에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한 디즈니가 어떤 나라도 손쓰지 못했던 망가진 도시들을 구제해냈다. 아테네는 기업에 팔린 최초의 도시가 됐다. 국가 없이 자족할 수 있는 것은 들짐승이거나 신일 거라고 장담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나라였다.
그 사건은 어떤 해답처럼 퍼져나갔다. 어느 나라에나 크고 작은 재난이 찾아왔고, 질병이 돌았고, 전쟁도 있었고, 단순한 파산일 때도 있었지만, 모든 나라가 팔리기 시작했다. 도시와 길이 팔렸고, 군대와 시장이 팔렸다. 학교와 문화재까지 팔렸다. 나라를 산 기업은 부자가 되어 더 많은 나라를 샀다. 한국은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때, 적당한 값에 팔렸다.
▼ 그냥 좀 얼떨떨했어. 그런 식으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구나. 부도가 나면 나라도 사라지는구나.
멀쩡한 정신일 때의 계나는 한국이 사라진 것에 대해 별로 충격을 받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무심하고 냉소적인 태도에 가까웠다.
▼ 100년 전에 한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됐어. 그때 사람들은 나라를 되찾으면 세상이 뒤집힐 거라고 생각했지. 모든 것이 바뀔 거라고 믿었던 거 같아. 하지만 사실 크게 변한 건 없었거든.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해. 그러니 한국이 없어졌다고 해서, 나라로부터 해방됐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별로 없어.
가끔은 이런 농담도 했다.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건 사라진 노래야. 동해물과 백두산과 하느님과 우리나라도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들이지.
하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 계나는 어김없이 한국이 사라진 것을 잊었다. 매번 한국이 없다는 것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계나는 나와 같은 한국어족으로 한국에서 호주로 이민을 간 뒤, 그곳에서 아들, 지금의 내 남편을 낳았다. 그 시절 나라와 나라 간의 이민은 아주 복잡한 절차와 조건이 필요했다. 계나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그 모든 과정을 통과했다고,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호주 시민권을 얻어냈다고, 어린 시절 남편에게 자주 말했다.
계나의 시대는 전 세계 노동시장이 어설픈 과도기를 겪고 있었고, 복지와 노후와 물가가 조금도 안정되지 않은 시대였다. 당시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삶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린 시기였고, 노력한 만큼 잘 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필요에 의해 나라를 선택한 계나는 시대에 앞선 세련된 사고방식의 여자였다. 나는 남편에게 그런 계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감탄하고, 조금은 감동받기도 했다.
호주는 페라리와 람보르기니가 접전을 벌이다가 페라리로 흡수 합병되었다. 페라리는 도시와 도시 사이의 간격이 멀고, 도로의 자동차 유동량이 적어 과속운전이 가능한 호주시장을 장악하며 ‘슈퍼기업’으로 성장했다. 모든 슈퍼기업이 그러하듯 지금 페라리는 수많은 계열사를 두었는데, 향수와 잡화 브랜드가 유명하고, 호텔과 외식 산업에서도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며, 특히 베이스 지역인 호주 농장에서 전 세계 농산물의 30%를 수확한다.
▼ 페라리가 밀가루 브랜드가 될 줄 누가 알았겠니?
당시 계나가 일하던 어학원도 페라리에 인수되어 계나는 페라리 어학원 회계사가 되었다. 일하던 건물의 층수도 책상 위치도 바뀌지 않았다. 슈퍼기업은 모든 분야에 계열사를 만들고 그 회사의 상품들만으로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과정에서 더 큰 기업이 작은 기업을 먹고, 더 거대한 기업이 되었다.
물론 슈퍼기업도 살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종교였다. 정확히는 대부분의 기업이 종교인, 특히 크리스천을 사원으로 받지 않겠다고 표명했다. 국가도 세금도 없는 세상에서 교회로 흘러들어가는 헌금이 막대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수천 년 역사의 기독교가 사라지고, 부활절과 성탄절이 사라졌다. 추수감사절이 사라진 건 칠면조의 멸종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더 이상 신이 일용할 양식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식량은 기업에서 나왔다.
호주는 거의 독점되었지만, 전(前) 한국 지역과 대부분의 지역은 여러 회사 사람들이 혼합되어 살았다. 회사마다 급여와 복지 혜택에 장단점이 있었다. 그 회사가 제휴를 맺은 타사(다른 회사)가 어딘가에 따라서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가령 페라리 사원은 주거와 식료품에서 큰 혜택을 보지만, 자사 계열사도 제휴처도 없는 의료 분야에는 취약해 맹장염에만 걸려도 몇 개월치 생활비를 지불해야 했다. 반면 남편과 내가 소속된 카카오는 의료 분야에서 독보적이었다. 알츠하이머 증세가 있는 계나는 치료를 위해 페라리에서 사직하고 남편에게 의탁했다. 슈퍼기업은 사원의 부양가족에게도 동일한 혜택을 주었다.
4
한때 한국이었던 땅으로 다시 돌아온 날, 계나는 말했다.
▼ 좋은 세상이 되었지 뭐니? 필요에 따라 회사를 고를 수 있잖니.
정말이었다. 사원은 회사의 자산이었다. 사원은 곧 소비자였고, 시장이었고, 경쟁력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조건의 회사로 이직할 수 있었다. 사원들의 이직을 막기 위해 회사들은 경쟁적으로 좋은 조건을 내걸었다. 이제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은 주 4일 동안 하루 6시간을 일한다. 많아진 여가시간엔 기업의 상품을 소비한다. 이러한 선순환 속에서 사원은 최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회사를 고른다. 물론 모두 정직원이다.
하지만 계나는 정신이 흐릿해지면 문득 묻는다.
▼ 아무 회사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 가족은?
나는 계나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침을 닦아준다. 그러면 계나는 곧 대화에 흥미를 잃고 어린아이처럼 딸아이와 논다. 가끔 계나는 무용하고 무가치한 의문에 오랫동안 골몰했다.
이제 국경과 정부는 사라졌다. 일본과 미국, 터키, 체코, 노르웨이, 아르헨티나라고 불렸던 그 어디라도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어디에나 기업이 있고, 기업은 모든 소비자에게 공평하다. 소비자는 태어난 땅과 인종, 성별, 언어, 신념에 따라 차별받지 않는다. 세금도, 제한도 없다. 치안은 기업이 위탁한 전문 치안업체에서 관리하고 법규가 사라졌지만 사칙과 엄격한 ‘매너’, 확실한 신분이 도시를 유지한다. 모두가 어딘가의 사원이기 때문이다.
▼ 기업사(史)를 배운다고? 역사처럼 배운단 말이니?
계나는 재미있어했다. 딸아이가 어린아이들을 위한 교육만화에서 맥도날드와 코카콜라의 합병 과정을 보고 온 참이었다. 맥콕(Mcoc)의 탄생은 기업사에 빠질 수 없는 사건이었다.
▼ 맥도날드랑 코카콜라라니. 나는 아직도 웃음이 난다. 카카오도 그래. 그건 원래 메신저 앱 회사였어. 카톡, 카톡, 귀여운 알림음으로 불현듯 세상에 나타났지. 카카오 종합병원이 전 세계에 생길 줄 누가 알았겠니?
이제 계나에게서는 이따금 나이 든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무엇에든 둔하게 반응하며 주위 사람들보다 조금 큰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는 알고 있는 추억을 되새기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몇 가지 농담을 자주 반복했다. 병원에 가는 길이면 차창 밖으로 거리의 모습을 하염없이 내다봤다. 더 이상 한국이 아닌 그곳에서, 씨제이와 현대와 하리보와 멀버리와 한화와 와이지와 카카오가 남은 그곳에서,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을 볼 수 있다는 듯이, 지혜로운 여자의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봤다.
어쩔 때는 계나가 내게 묻는다.
▼ 삼성은 사라졌니?
네. 여기저기 흩어졌어요.
▼ 애플은?
호가든에 흡수됐어요. 이제 호가든폰이 나와요.
▼ 정말 이상하지.
계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 무언가는 그대로 남고 무언가는 사라지는 일 말이야.
나는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필요와 수요가 없는 건 모두 사라졌다고, 계나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계나가 한국이 없다는 걸 잊을 때마다, 왜 한국이 사라졌냐고 물을 때마다, 조금은 고민한다. 그녀에게 거짓말을 해줄까. 그녀가 기쁘도록 어르고 달래줄까. 한번은 그런 적이 있다. 아직 한국은 있다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계나에게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예상과 달리 계나는 웃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늙고 병든 여자를 동정하는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계나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5
딸아이는 계나의 품으로 파고들어 자는 것을 좋아했다. 계나가 딱딱한 손바닥으로 머리와 등을 쓸어주며 가만가만 들려주는 이야기를 재밌게 들었다. 계나는 아이에게 신이 세상에 관여하고, 왕자와 공주가 사랑하고, 영웅이 악당을 무찌르던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런 옛날이야기를 말하듯, 사라진 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곰과 호랑이가 동굴에서 마늘을 먹던 이야기나, 날개 달린 말이 품던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오는 이야기였다. 때로는 사람들이 지형이나 종교와 같은 이유로 무리를 짓고 싸우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수십 년간의 휴전 상태 그대로 사라진 나라의 이야기였다. 나라를 빛낸 자랑스러운 사람의 이야기도 있었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의 이야기도 있었다. 어떤 강의 기적과 어떤 배의 침몰도 있었다. 아이는 그 모든 이야기를 신화와 전설처럼 듣는다. 단 한 번도 나라를 가져본 적 없는 아이는 이야기에 푹 빠져 황홀한 얼굴이 되지만, 절대로 그런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아이의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세계였다.
그럼에도 계나는 아이의 침대 맡에서 아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어두운 방에 켜둔 오렌지색 스탠드 불빛에 반쯤 모습을 드러낸 채,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런 세상이 있었다고,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고. 서운하지도 노하지도 않은 얼굴로 말한다. 그 순간 아이에게 계나는, 전설처럼 보인다. 우다영 ● 1990년 서울 출생 ●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 2014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셋’ 으로 당선
우다영 | 소설가 nayawdy@naver.com <이 기사는 신동아|11월호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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