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12월호/‘조선 복식을 입은 남자’ 모델 논란
● 원통형 방건? 접어서 보관…각 안 사라져
● 조선 철릭? 옷깃 동정 없는 중국 철릭 가까워
● 1607~08년 제작? 루벤스 건강·재정 악화 시기
안토니오 코레아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베니스의 개성상인’ 등 베스트셀러의 주인공으로 동서양의 시대와 역사를 가로질러 흥미진진한 활약상을 펼친 조선인이다. 안토니오는 1600년경의 실존 인물로, 왜구에게 납치돼 노예로 팔렸으나 운명의 무거운 수레바퀴를 스스로 돌려 개척한 풍운아로 알려져 있다. 특히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의 초상을 그렸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욱 살갑다. 루벤스는 ‘플랜더스의 개’ 마지막 배경으로 나오는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제단화를 그린 거장이다.
현재 미국 LA 게티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복식을 입은 남자’가 바로 안토니오 코레아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은 곽차섭 부산대 사학과 교수의 책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푸른역사, 2004년)에서 비롯한다(그림 1). 2011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초상화의 비밀’ 전시회에선 루벤스의 그림이 대형 걸개그림으로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루벤스가 안토니오 코레아의 초상을 그렸다는 걸 상식으로 여기게 됐다. “조선인 가능성 낮다”
게티 미술관이 개인 소장가로부터 구입한 루벤스의 소묘는 당초 중국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머리에 쓴 관모가 방건(方巾,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평상시 착용한 사각 건)이라는 곽 교수의 주장에 따라 조선인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여기에다 상투를 틀고 조선 철릭을 입었다는 관찰이 덧붙으면서 게티 미술관 측은 곽 교수의 견해를 수용하고 작품 제목을 수정했다.
곽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루벤스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인일 뿐 아니라 다름 아닌 안토니오 코레아이며, 따라서 작품 제작 시점을 1607~08년으로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아직 게티 미술관 측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은 안트베르펜의 예수회 교회 주제단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동양인을 그리기 위한 준비 소묘로 알려졌다. 그래서 제단화의 주문 및 완성 시점을 고려해 제작 시점을 1617년쯤으로 보는 게 학계의 통설인데 이것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그림 2).
안트베르펜을 떠나 현재 빈 미술사박물관에서 소장하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 등장하는 동양인과 게티 미술관의 소묘 주인공은 옷차림과 생김새가 판박이 같아 동일 인물로 보인다. 학계와 곽 교수 모두 이에 동의한다. 두 사람의 얼굴만 비교해도 쌍꺼풀진 눈, 바깥으로 솟은 눈꼬리, 깡총한 눈썹, 내려앉은 콧부리, 단단한 콧방울, 돌출형 치아와 도톰한 입술, 동그란 광대뼈, 좁은 하관, 그리고 귓불의 모양이 같아서 같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학계는 루벤스의 이 작품을 본격적인 유화 작업의 준비 소묘로 보는 반면, 곽 교수는 소묘가 독립 작품이며 루벤스가 로마에서 안토니오 코레아를 만나 챙겨둔 조선인 소묘를 10년 뒤 안트베르펜 제단화를 작업하면서 꺼내 베껴 썼다는 주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2011년 전시에서도 안토니오 코레아에 대한 곽 교수의 주장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도록에 수록했다.
하지만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루벤스 소묘의 주인공은 조선인일 가능성이 희박하고 그가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은 더욱 낮다.
안토니오 코레아에 관한 문헌 기록은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쓴 ‘나의 세계일주기’에 간략하게 남아 있다. 카를레티는 △일본에서 조선인 노예 5명을 헐값에 사서 세례를 받게 한 뒤 인도 고아에 4명을 풀어주고 나머지 1명을 이탈리아로 데려왔는데 △그가 피렌체에 머물다 지금은 로마에 있는 것으로 알며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라고 밝혔다. 조선인이라는 의미에서 안토니오 코레아라고 알려진 그의 나이나 생김새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엄연한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망건은 어디로 갔을까
곽차섭 교수는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인이 맞다면 혹시 그가 문헌에서 입증된 안토니오 코레아일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그 가능성을 좁혀본다. 안토니오는 1606년 말 이후 로마에 체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루벤스는 1608년 가을까지 로마에 머물렀으니 화가와 모델이 1607~08년에 만나 소묘를 그렸다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난해하고 복잡한 미술사의 미로(迷路)에서 실물과 문헌이 절묘하게 일치하는 행복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연구 결과는 놀라웠다. 곽 교수의 책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가 학계의 새로운 학설로 인정받았고, 역사학자가 분야도 생소한 서양미술사학의 오랜 난제를 해결한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지금껏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곽 교수는 그림을 올바로 관찰하지 않은 것 같다.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인이라는 가장 큰 증거는 조선 방건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과연 방건이 맞을까. 관모의 형태를 보면 윗부분이 넓어지는 둥근 원통형이다. 방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각진 형태가 특징이다. 둥근 방건은 ‘동그란 사각형’이라는 표현만큼 심각한 형용모순이다. 이 문제에 대해 곽 교수는 “언뜻 보기에 드로잉 속의 방건은 사각형이 아니라 둥근 모양인 듯도 하지만, 이는 여러 해에 걸쳐 사용함으로써 각진 부분이 완화된 결과로 볼 수 있다”(책의 89쪽)고 완곡하게 해명한다.
방건을 오래 쓰면 세로로 각진 부분이 저절로 펴진다는 주장인데, 방건은 벗어둘 때 납작하게 접기 때문에 해져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써도 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이마에 밀착하는 부분은 각이 다소 ‘완화’될지 몰라도, 방건 윗부분까지 반듯하게 펴지진 않는다. 방건은 굵은 재료로 사각형 틀을 만들고 가는 올로 면을 엮은 다음 4개의 사각형 틀을 옆으로 연결해 제작한다. 방건을 오래 사용할 경우 사각형 틀을 묶은 부분이 떨어져나갈 수는 있어도 굵은 틀과 각이 사라져 둥근 모양으로 변할 수는 없다. 생선구이 석쇠를 오래 썼다고 가운데 망은 멀쩡한데 바깥의 굵은 틀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망건(網巾, 상투를 틀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에 두르는 폭 10㎝가량의 그물처럼 생긴 띠)도 보이지 않는다. 망건을 안 두르고 방건을 쓰는 건 맨발에 정장 구두보다 각이 안 나오는 ‘난감 패션’이다. 17세기 북유럽 미술계를 이끌며 플랑드르 바로크 황금시대를 연 거장 루벤스의 눈이 방건 아래 망건을 놓쳤을까. 더욱이 ‘낡은 방건 이론’이 사실이라면, 빈 제단화의 주인공은 금실로 짠 비단 철릭과 값진 가죽 신발과는 어울리지 않게 각이 사라지도록 낡아빠진 관모를 보란 듯 쓰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잘려나간 가장자리
루벤스 소묘의 주인공을 조선인으로 보는 또 다른 증거는 ‘조선 철릭’이다. 곽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복식사학자 석주선 선생의 견해를 인용한다. 하지만 이 옷은 깃이 넓고 동정이 없어 조선 철릭이라기보다는 같은 시기 예수회 선교사 니콜라스 트리고나 마테오 리치가 입던 중국 철릭에 가까워 보인다. 목깃에 달린 얇은 동정이 조선 철릭의 특징인데, 소묘 속 동양인이 입은 철릭에는 동정이 없다. 만약 관모와 복식이 조선인의 것이 아니라면 이를 근거로 소묘 주인공을 조선인으로 보는 주장은 근거를 잃게 된다.
또 하나. 루벤스의 소묘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애당초 루벤스가 완성한 소묘 작품은 현재 상태보다 조금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무슨 이유에선지 가장자리를 잘라내고 크기가 줄었는데, 그 증거는 작품의 가장자리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소묘의 가장자리에는 상하좌우에 테두리 선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테두리 선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테두리 선을 넘어 종이 끝까지 소묘 선들이 진행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 하단부도 똑같이 잘려나갔다. 좌우는 절단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소묘의 주인공이 쓴 관모는 각이 진 방건 형태가 아니라 높이가 훨씬 더 올라가는 원통형이며, 빈 제단화의 동양인이 머리에 쓴 관모와 동일한 형태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에 터 잡아 복원하면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그림 3, 4). 곽 교수는 소묘 작품의 상하단 디테일을 흘려보거나 놓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자신의 ‘방건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시했을 수도 있다.
방건과 조선 철릭이 조선인이라는 주장의 근거라면 루벤스 소묘의 모델은 조선인이 될 수 없다. 조선인이 어쩌다 이국의 복식을 입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같은 논리로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사람이 그랬을 가능성도 똑같이 존재하기에 이런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
그림의 주인공이 조선인이 아니라면 그가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도 없다. 하지만 곽 교수의 주장대로 1607~08년 루벤스가 로마에서 조선인 안토니오를 만나 모델이 돼달라고 요청하고 소묘 작업을 했다는 추리가 성립하려면 어떤 조건들이 충족돼야 할까.
루벤스에게 1607~08년은 로마 키에사 누오바 교회의 발리첼라 제단화 수령 거부, 교회 주제단부 장식 프로그램의 전면적 수정과 재작업, 또한 건강과 재정 문제로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장차 10년쯤 뒤에 안트베르펜 예수회 교회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제단화 주문에 대비해 △예수회 선교활동을 벌이던 인도, 중국, 일본을 대표할 인물상을 모색하고 △유럽에서 모델을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중국인은 제쳐놓고 △예수회 선교와도 상관없고 외교관계도 없어 유럽 전체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조선인을 굳이 수소문해서 안토니오를 찾아낸 뒤 △그에게 혹시 동양의 고관대작이나 외교 관료, 고위 성직자가 걸칠 만한 의관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고 △의관을 정제해 초상 소묘의 모델로 서줄 것을 요청하고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도 상당한 모델료를 지불했다.
또한 안토니오는 왜구에게 납치돼 노예로 팔린 뒤 파란만장한 역경과 거친 역사의 파고를 넘나들면서도 자신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황금색 비단 철릭과 사치스러운 이국풍 가죽 신발, 높은 관모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플랑드르 화가의 모델을 설 때 요긴하게 활용했다.
정말 그랬을까. 그럴 수 있었을까. 곽 교수의 추리는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이 수차례 중첩됨으로써 논리의 개연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루벤스의 동양인 모델은 1617년경 안트베르펜 또는 인근 도시를 방문한 예수회 선교 관련 인물이거나 외교사절의 일원이 아닐까. 복식사 연구와 문헌 연구가 더 축적되면 언젠가 실마리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한다. 루벤스의 동양인 모델이 400년을 건너뛰어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에 대문짝보다 더 큼직하게 걸린 자신의 초상을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다(그림5).
노성두 ● 1959년 경남 산청 출생 ● 한국외대 독일어과 졸업, 독일 쾰른대 철학 박사(서양미술사 전공), 이탈리아 어문학 박사 ● 現 시민아카데미 인문학습원 교장 ● 저서 및 논문 : ‘성화의 미소’ ‘그리스 미술 이야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회화론’ 등 노성두 | 미술사학자 nohshin2@naver.com <이 기사는 신동아|12월호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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