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의 경우, 가까운 구간 이용요금은 먼 구간 이용요금보다 싸야 한다. 모든 승객이 그렇게 믿고 있고, 상식적으로도 당연한 일이다. 수도권 지하철에선 이런 상식적인 원칙이 적용되지 않고 있다. 많은 시민이 지하철을 이용하므로, 금액의 과소를 떠나 관심거리임은 분명하다.
최근 필자는 서울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역에서 3호선 양재역까지 가는 실험을 했다. 성신여대역에서 만난 시민들은 “충무로역에서 3호선으로 한 번 갈아탄 뒤 양재역으로 가는 노선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가 이 노선을 이용한 결과 성신여대역-양재역 구간 이용요금으로 1450원이 나왔다. 그런데 양재역 다음 역인 매봉역에서 하차했을 땐 1350원이 나왔다. 성신여대역-양재역 구간요금이 1개 역을 더 지나는 성신여대역-매봉역 구간요금보다 100원이 더 나온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서울교통공사를 비롯한 지하철(전철) 당국의 요금 산정 방식에 있다. 공사 측이 설정한 방식에 따르면, 성신여대역-매봉역 구간요금 1350원은 4호선 성신여대역에서 출발해 보문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 이어 신당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이어 왕십리역에서 분당선으로 갈아타고, 이어 도곡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면서 성신여대역-매봉역 간 지리적 최단거리를 이용하는 것을 가정한 요금이었다. 공사 측 방식에 따르면, 양재역은 매봉역 다음에 나오는 역이므로 1450원이 되는 것이다.
20분 더 걸려
문제는 성신여대역에서 양재역으로 가는 이용객 중에 공사 측이 정한 노선을 택하는 이용객이 실제로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필자가 4번을 갈아타는 공사 측 노선을 이용해본 결과, 다수 이용객이 택하는 1번을 갈아타는 노선보다 평균 20~22분이 더 소요됐다. 지하철 이용객 김모(25·서울 양재동) 씨는 “성신여대역-양재역 구간을 이용하면서 4번을 갈아타는 노선을 택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비현실적 혹은 불합리한 요금이 부과되는 것으로 의심되는 구간은 수도권 지하철 노선 곳곳에서 발견된다. 동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재학생 한모(25) 씨는 통학 시 경의중앙선 능곡역에서 승차해 대곡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탄 후 동대입구역에서 내린다. 교통카드를 사용하는 한씨는 편도 요금으로 1550원을 낸다고 한다. 그는 “능곡역보다 한 정거장 전인 행신역에서 승차해 동대입구역에서 내리면 오히려 100원이 싼 1450원만 낸다는 것을 최근 알게 됐다. 이런 요금 체계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목적지 지나 내렸는데…”
장한평역 부근에서 일하는 박모(25·광운대 생활체육학과 재학생) 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평소 자가용을 이용하던 박씨는 최근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일하는 곳까지 이동했다. 그는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지하철 앱을 검색해 얻은 경로를 택했다. 지하철 앱은 ‘광운대역에서 승차해 석계역, 태릉입구역, 군자역에서 갈아타 장한평역으로 가는 경로가 가장 빠르다’고 안내했다. 장씨는 “실수로 목적지인 장한평역을 지나쳐 답십리역에서 내렸는데, 장한평역에서 내릴 때보다 요금이 100원 덜 나왔다”고 말했다.
서울교통공사는 수도권 지하철 기본운임을 ‘10km 이내 1250원’으로 책정해놓고 있다. 50km 내에선 5km마다 100원이 추가되고 50km 밖에선 8km마다 100원이 추가된다. 이렇게 수도권 지하철은 이용하는 거리에 비례해 요금을 더 내는 방식을 적용한다. 그런데 이 거리 계산 시 최소 환승이나 최단시간이 아닌 최단거리가 기준이 된다. 이에 따라 승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경로 이외에 단순 거리가 더 짧은 경로가 있는 경우, 1개 역을 더 지나도 요금이 더 적게 나오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공사의 요금 산정 방식을 한씨 사례에 적용하면, 한씨가 선택한 노선의 반대 방향으로 출발해 홍대입구역에서 2호선으로, 을지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 동대입구역에 도착한다. 한씨는 “홍대입구역 방향으로 가면 환승을 한 번 더 해야 하기에 불편하다”고 말했다. 박씨 사례에서도, 공사 측 노선은 회기역과 왕십리역에서 각각 환승하는 경로다.
심지어 환승이 필요 없는 구간에서도 요금 산정 논란이 발생한다. 2호선 아현역에서 출발해 2호선 서울대입구역 혹은 낙성대역까지 가는 구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현역, 서울대입구역, 낙성대역은 모두 2호선에 있으므로 대다수 이용자는 굳이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지 않고 그냥 2호선을 타고 간다. 이렇게 가는 것이 최단시간에 해당한다. 그런데 아현역-서울대입구역 구간요금이 아현역-낙성대역(서울대입구역 다음 역) 구간요금보다 더 나온다.
공사 측 최단거리로 계산하면, 아현역-서울대입구역 구간의 경우 충정로역, 공덕역, 삼각지역, 사당역에서 각각 환승해야 한다. 마지막 환승역인 사당역을 기점으로 할 땐 낙성대역이 서울대입구역보다 먼저 나오는 역이므로 이렇게 요금이 산정되는 것이다. 환승하지 않고 2호선을 타고 곧장 가면 30분이 걸리지만, 이렇게 4번 환승해 가면 그 2배인 60분이 소요된다.
이처럼 공사의 최단거리 요금 산정 방식은 승객들의 지하철 이용 패턴이나 상식과는 동떨어진 비합리적인 경로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직장인 이희남(25) 씨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시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최단시간을 최단거리와 동일시한다. 요금 체계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지하철 승객이 즐겨 사용하는 휴대전화 앱은 대체로 최단시간과 최소 환승 기준으로 경로를 안내한다. 안드로이드 기준 다운로드 수 상위 앱이 모두 그렇다. 이 중 한 앱 개발사 관계자는 “최단시간이 곧 최단거리”라고 했다. 지하철 이용객뿐만 아니라 지하철 앱 개발사도 ‘최단거리=최단시간’ 통념을 공유한다.
“승·하차 조합 49만여 개”
4월 기준 상위 4개 지하철 앱의 다운로드 수는 2600만 건에 달한다. 3월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시 지하철 하루 평균 이용객은 900만 명에 달한다. 수도권 지하철은 서울 시내뿐만 아니라 경기, 인천, 충청, 강원까지 연결된다. ‘수많은 사람의 일상과 연관된 지하철 요금이 이들의 이용 패턴과는 맞지 않는 이상한 방식으로 책정돼 있다’는 논란이어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시민들은 공사 홈페이지의 ‘사이버 스테이션’에서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에 대해 공사 측 관계자는 “수도권 전철역이 700여 개, 승·하차 조합이 49만여 개에 달한다”고 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중간에 환승역이 많은 특정 구간들만을 위해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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