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는 중간관리자들은 오늘도 위아래로 치이며 고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치열한 경쟁과 끝없이 쏟아지는 업무에 몸과 마음은 해질 대로 해졌다. 어디 하나 툭 터놓고 넋두리할 곳도 없는 쓸쓸한 현실. 차가운 바람이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초겨울의 문턱에서, 이 시대 중간관리자들의 실상을 콩트로 엮어봤다. 》
# Episode 1. “우리 기수가 위험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오늘도 서울 신촌 작업실로 출근한 시나리오 작가 김성호. 문득 살갗에 와 닿는 느낌이 스산하다. 노트북 전원을 켠 성호는 커피를 한 모금 넘기며 바깥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거리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겨울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다. 어느새 곧 연말이다. 올해 나이 쉰. 책상에 놓인 탁상달력을 보니 올해가 며칠 안 남았다.
지르르, 지르르. 휴대전화가 몸을 떨며 액정 화면에 낯익은 이름이 뜬다. 최만식. 대한고등학교 3학년 2반 체육부장 만식이다. 성호가 답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역시 재빠르다.
“성호야. 이게 얼마 만이냐. 지금 통화되나?”
쾌활한 성격과 화려한 입담으로 급우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녀석. 체육부장이면서 오락부장 역할도 한 만식이는 수학여행이나 축제 때 늘 반 장기자랑을 주도했다. 학창 시절 범생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날라리도 아니었던 나와는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로?
“12월 넷째 주 금요일 동창회인 거 알지?”
아차차. 동창회 한다고 했지. 예년과 다르게 올해는 개교 50주년이자, 우리에게는 졸업 3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다.
“이번에 ‘50기 동창회 사업’의 하나로 ‘大韓人(대한인)’이라는 타이틀로 동창회지를 발간하기로 했어. 네가 동창들을 인터뷰하고 원고를 좀 써줬으면 해. 사실 얼마 전에 대한고 총동창회에서 40대, 50대 졸업생들 대상으로 정신건강 조사를 했는데, 우리 기수가 제일 위험했다더라. 그래서 이참에 동창들 살아가는 얘기를 좀 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런데, 그 일을 왜 나한테….”
“글 쓰는 게 너 전문이잖아. 학교 다닐 때 문예부장도 했고.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원고 마감까지 한 달 정도 남았으니까 애들이 어떻게 사는지 만나서 함 들어봐주라.”
“글쎄. 내가 할 수 있을까….”
“아참, 내가 이 말을 깜빡 했구나. 원고료는 취재비 포함해 100만 원이야. 은행, 계좌번호 찍어주면 바로 입금할게.”
뭐? 100만 원? 사람은 물질에 약한 동물이라고 했던가. 나라고 별수 있겠나 싶다. 그래 한번 해보지 뭐. 이참에 다들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고 말이야.
#Episode 2.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만식이 e메일로 보내온 파일에는 3학년 2반 동창들의 연락처와 주소가 적혀 있다. 누구부터 만나는 게 좋을까. 명단을 쭉 훑다 문득 한 이름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정봉해. 전형적인 모범생. 학창 시절 학생회장도 하고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똑똑한 놈이었다. ‘대한고 최고 수재’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한민국 최고 대학 한국대 컴퓨터공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미래그룹에서 일한다고 얘기 들은 것 같은데. 어떻게 지내려나.
“봉해야, 성호다. 잘 지내냐?”
“대한고 성호? 이게 얼마만이야. 먼저 연락해줘서 고맙다.”
모범생들의 특징 하나. 안부 인사마저 모범적이다. 반가움을 표하는 동시에 고마움을 잊지 않는 언변이라니. 그날 저녁 서울 강남에 있는 한 파스타 집에서 만난 봉해는 단정하고 점잖아 보였다. 그가 건넨 명함엔 ‘미래텔레콤 산하 종합기술원 연구1팀 팀장(부장)’이라 쓰여 있다. 미래그룹에서 일한다는 얘기가 사실이었군.
“지금은 미래텔레콤에 있지만 내년에는 회사 나올 생각이야.”
“응? 회사를 나온다니. 미래텔레콤을?”
“박사학위 취득한 후에 처음에는 한국대 의대 연구소에서 연구조교수로 7년간 일했어. 주로 의료기술 연구하는 과제를 맡았는데, 어느 날 미래그룹에서 신사업을 준비한다면서 IT, 헬스케어에 전문가를 찾는다고 연락이 왔어. 마침 학교 연구소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데다 현장에서 좀 더 실질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 이직했지. 자체 팀까지 꾸려주고, 직책도 중간관리자급이라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옮겼어.”
“그래, 기억난다. 몇 년 전에 미래그룹이 미래 먹거리사업으로 헬스케어 분야에 집중한다는 보도가 많이 나왔었지?”
“그래서 나도 입사 후 몇 달은 콧노래 불렀어. 회사가 인력도 충원해주고 연구비도 지원해준다고 약속했거든. 그런데 어이없게도 거의 다 지켜지지 않았어. 미래그룹 회장 둘째 아들이 회사 대표로 취임하면서 조직을 갈아엎어버렸거든. 투자자들한테 하루빨리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면서 우리 팀을 없애버렸어. 그 덕에 나는 다른 신사업팀에 들어가게 됐고. 졸지에 닭 쫓던 개 신세 된 거지 뭐. 어떻게든 우리 팀은 지키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 팀원들한테 했던 약속도 다 공염불이 됐지 뭐.”
미래그룹은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이다. 생산규모와 시장점유율, 수출액과 종업원 수, 재무 상황, 기타 기업 활동 면에서 글로벌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업. 더욱이 신기술을 선도하는 국내 대표 기업으로 꼽히곤 했는데, 높은 분의 말 한마디에 조직에 이렇게 평지풍파가 일다니, 씁쓸한 일이다.
“설마 팀이 바뀌었다고 회사를 나오려는 건 아니지?”
“물론. 직장생활 하면서 제일 거지 같은 게 뭔지 알아? 다들 개인 플레이하면서 겉으로는 팀플레이하는 척한다는 거야. 회사를 진정 ‘팀 경기’로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 오너밖에 없어. 오너에게는 팀의 성과가 곧 개인의 성과요, 개인의 성과가 팀의 성과니까.”
속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봉해는 말을 이어갔다.
“고객사와 이미 얘기가 끝난 계약도 내부에서 일이 진행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 왜 그런 줄 알아? 프로젝트 수익을 기획팀, 영업팀, 자원팀, 연구팀이 몇 퍼센트씩 나눌 것인지를 두고 몇날 며칠을 싸우거든. 고객이 돈을 준다는데도 회사 안에서 교통정리가 안 돼 계약을 못 하는 거지.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냐? 차라리 경쟁사와 싸우는 거라면 이기든 지든 정리가 깔끔한데, 내부의 적끼리 얼굴 붉히면서 싸우는 꼴이라니. 나중엔 졸지에 기획팀장, 영업팀장, 자원팀장, 연구팀장 간의 자존심 싸움이 돼버린다니까.”
봉해는 팔짱을 끼며 혀를 끌끌 찼다. 그의 접시엔 몇 입 먹다 만 파스타가 식어가고 있었다.
“차라리 대놓고 다 같이 개인 플레이를 하면 다행이지. 경영진은 한 번씩 사람들 모아놓고 팀워크가 어쩌고 회사의 성장이 저쩌고. 그럼 평가도 그런 식으로 하든가. 개인끼리 경쟁하게 제도를 만들어놓고 ‘너희들 서로 사이좋게 지내’ 한마디 툭 던진다고 일이 되겠나.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출지 모르겠어. 팀을 위해 개인의 실적을 희생하면 바보가 되고, 팀을 제쳐두고 개인 플레이하면 경우 없는 놈이 되고.”
그동안 가슴에 쌓인 게 많았구나. 와인 병을 들어 봉해에게 위로주를 건넸다.
“개인이 열심히 일하게 만들면 조직 전체도 저절로 좋아지겠지 싶다면 오산이야.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던 시절에, 어느 도시에서 코브라가 창궐하니까 영국 정부가 코브라 시체를 가져오면 상금을 주겠다고 했어. 결과가 어떻게 된 줄 알아?”
“너도나도 코브라 시체를 가져왔겠지.”
“천만에. 주민들이 상금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코브라를 사육하기 시작했어. 영국 정부는 제도가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자 상금을 없애버렸지. 코브라 사육을 할 이유가 사라진 주민들은 코브라를 방생해버려. 그 바람에 도시에는 코브라가 더 늘어났어. 회사도 똑같아. 지금 회사에는 코브라들이 판을 치고 있어. 코브라 농장 주인들은 임원이 되고 있고.”
코브라 효과(Cobra Effect).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정책이 도리어 그 문제를 심화시키는 현상이다. 이런 역효과는 지금도 회사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회사 나오면 어쩔 생각이야?”
“미래텔레콤으로 이직하기 전부터 블로그에 글을 틈틈이 써왔어. 그땐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재미있게 공부한 걸 글로 남기고 사람들과 공유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업계 사람들이 내 글을 많이 보고 서로 의견도 나누더라고. 얼마 전에는 블로그 글을 묶어 책도 하나 냈어. 그게 기폭제가 됐다고 해야 하나? 지금은 정부나 기업, 연구소, 학교, 병원 등에서 불러줘 간간이 강의를 나가고 있어. 회사 나오면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를 연구하는 1인 기업을 만들까 해.”
학자로서의 지식을 사업으로 연결하다니, 역시 모범생은 다르다.
“그래서 아쉽지만 다음 달 동창회는 참석하기 힘들 거 같다. 일본에서 헬스케어 해외 학자들이 모여서 학회를 열거든. 1년에 한 번 모이는 자리라 빠질 수가 없어. 성호야, 오늘 널 만나 무척 반가웠다.”
2차는 다음으로 기약했다. 아쉽지만 어쩌랴. 고등학생 아들이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어 공부를 봐줘야 한다는데. 봉해야 건투를 빈다. 자식, 넌 분명 잘 해낼거야.
# Episode 3. 남은 건 비대해진 몸무게뿐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겨울바람이 제법 차다. 강남대로 인근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를 호출하려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어라? 대한고 3학년 2반 김영식이다.
“여보세요.”
“성호야, 너 지금 어디야?”
“강남대로.”
“그럼 뒤 좀 돌아봐.”
고개를 돌리니 거구의 파이터를 연상케 하는 남성이 나를 보며 빙그레 웃고 있다.
“혹시 영… 영식이?”
“그래. 인마, 나야. 어쩌다 강남 한복판에서 딱 너를 보냐. 우리 한 5년 만인가?”
영식은 전교에서 까부는 걸로 유명한 녀석이었다. 상급 학생들은 물론 담임선생님한테도 까불대던 놈이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은 넉살 좋게 웃는 영식이를 보며 “너는 까불어도 밉지가 않다”고 했던 게 어렴풋 기억난다. 그나저나 얘는 언제 이렇게 몸이 불어버렸담. 5년 전 봤을 때 이렇지 않던 것 같은데.
“지난해 연말 재무팀 부장 승진하고 순식간에 90㎏까지 찌더라. 회식은 물론이고 퇴근하고 혼자 술을 홀짝홀짝 마셨더니 이렇게 됐네. 흐흐.”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근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식아, 늦었지만 승진 축하한다.”
“에이, 부끄럽게 축하는 무슨….”
말은 그렇게 해도 내심 기분이 좋은가 보다. 주문한 치킨 한 마리와 골뱅이무침, 맥주 두 잔이 나왔다.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켠 영식이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으로 쓸어냈다.
“회사는 어때?”
“일이야 항상 많지. 우리 사장이 일이란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고 하대? 그래, 우리가 하는 건 파도타기야. 몇 년 전엔 아주 높은 파도가 오는 바람에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지(웃음).”
영식이 다니는 건설회사는 2014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2년 만인 2016년 회생절차에서 벗어났다. 앞날이 불안정할수록 단순하게 생각해야 하는 법이다. 영식 또한 당시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직원이 다 함께 허리띠를 졸라맨 덕분에 자금 사정이 차츰 좋아지고 있단다.
“일은 여전히 많고?”
“요즘 오후 6시 넘으면 다들 퇴근해. 임원들은 땡 하자마자 가고. 어쩌다 임원이 ‘오늘 저녁 먹자’ 이러면, 젊은 사원들은 ‘안 되는데요’ ‘약속 있습니다’ 그래. 약속 있다는데 뭐라겠어. 결국 제일 만만한 게 바로 밑에 있는 관리직이지. 부장급까지는 그 분위기를 알잖아. 거기서 못 벗어나는 사람이 우리 세대야. 낀 세대. 대리급, 과장급에서 올라온 우리 세대는 그런 문화에 젖어 있단 말이야. 그래서 아직까지 스트레스를 받는 거지. 자동으로 ‘상무님 저 시간 됩니다’ 해놓고 돌아서서 ‘아이 씨’ 이러지.”
“요새 젊은 애들은 확실히 눈치를 안 보지?”
“한 5년 전부터 분위기가 바뀐 거 같은데? 대놓고 싫은 기색이니까 회식도 갑자기 잡으면 안 돼. 회사에서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 있으면 내가 해야 돼.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하기 전부터 그랬어. 정해진 근무시간이라는 게 있대나 어쨌대나. 말도 마. 노조 없는 회사는 직원들이 전부 잠재적인 노조야.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라니 뭐 그런 것들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우리야 ‘까라면 까’는 세대지만 요즘 애들은 아니지.”
“그걸 누가 몰라? 윗사람 비위 맞추는 거보다 아랫사람 눈치 보는 게 더 힘들어. 왜 이렇게 눈치를 주냐 자식들. 버르장머리 없기는…….”
아이쿠,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할 땐 화제를 돌리는 게 상책이다.
“제수씨는 잘 지내? 애들이 캐나다에서 공부한다고 했지?”
“응 잘 있지. 애들은 아주 거기 눌러 살려고 해. 애 엄마가 그렇게 둘러대는 건지. 학기 벌써 끝났지. 일주일 여행하고 돌아온다더니 애 엄마가 어제 전화 왔어. 겨울 내내 그냥 있으면 안 되냐고. 나보고 오라고. 아니 연말 휴가가 어디 있어? 여름휴가도 사흘 겨우 썼는데. 이러다 애 엄마가 이혼하자고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술이 들어가자 영식이 벨트를 풀고 몸을 뒤로 젖힌다.
“그나저나 너 건강관리 하고 있는 거야? 운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한때 골프 열심히 치더니.”
“그땐 상사가 시간만 나면 골프 치러 가자고 하도 귀찮게 하니까 그랬지. 근데 뭐 잘 안 되네. 나랑은 골프가 안 맞나봐.”
“요즘은 관리자가 골프 못 치면 욕먹는다던데.”
“회사에서는 욕먹지. 나보고 다들 그동안 뭐 했냐고 한다. 근데 너 그거 아냐? 회사에서 골프 못 치면 그동안 골프도 안 치고 뭐 했냐고 욕먹고, 골프 잘 치면 일 안 하고 골프만 쳤냐고 욕먹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딱 상사만큼 치면 돼. 그게 고수지. 근데 난 잘 안 맞아. 등산이나 그런 게 좋은데. 성호야, 산 한번 안 갈래? 겨울에도 계단 위주로 타면 안전하게 갔다 와. 내려와서 막걸리도 한잔하고.”
“난 아직 애들이 어려서 주말농장 다녀.”
“흐흐, 주말농장. 그래 재밌게 산다.”
영식은 맥주 한 잔을 추가 주문했다. 우리 또래로 보이는 남자 사장이 맥주를 가져다주면서 서비스로 뻥튀기를 챙겨줬다. 영식의 눈이 남자 사장의 뒷모습을 계속 좇는다.
“나도 차라리 저 사장님처럼 장사하면 위아래 눈치 안 보고 마음 편하게 살 텐데.”
“열에 아홉은 장사 안 돼서 문 닫는대.”
“그렇긴 하지. 하긴 우리학교 2학년 동창 중에 손경태라고 있는데, 걔가 회사에서 명퇴당하고 치킨집 차렸었거든. 가게 오픈하고 딱 보름 동안만 매출이 나오더래. 결국 퇴직금 다 날렸지 뭐. 우여곡절 끝에 직장에 들어가 밤낮없이 일하다가 어느 날 속이 하도 쓰려 병원엘 갔더니 의사가 위암이라고 했다더라. 그래도 다행히 초기라 치료하면 괜찮대. 암보험도 들어놓았고.”
“저런. 우리도 이제 조심해야 할 나이야. 영식이, 너 살 좀 빼. 복부비만 그거 위험한 거야.”
“그렇지. 나도 살 빼야지.”
어느새 밖은 깜깜하고 거리는 텅 비었다. 오후 11시 40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영식이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덩치는 산만 해가지고. 영식아, 어깨 좀 펴고 다녀라.
# Episode 4. 모든 문책은 나의 것, 억울해도 어쩌랴
다음 날. 술이 약한 편인데 어제 와인에 맥주까지 마신 탓인지 속이 부대낀다. 오늘 점심엔 해장을 해야겠다. 점심 때 용접자동화기업의 부장인 김경태와 만나기로 했다. 경태는 인쇄소 공장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일찌감치 기술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서울 문래동 공장 근처 돼지국밥집에서 만나기로 한 경태는 작업복 차림으로 약속시간보다 20분 정도 늦게 나왔다.
“성호야. 오래 기다렸지? 미안.”
“일이 바쁜가보네. 내가 괜히 시간 뺏은 거 아냐?”
“아냐. 회사에서 대졸 신입사원을 뽑았는데, 공장 견학한다고 지금 와 있거든. 이것저것 설명해주느라 늦었어.”
흔히들 높으신 분들은 아랫사람의 현실을 잘 모른다고 말한다. 이는 거의 맞는 말이다. 사무직, 생산직, 기술직, 연구직 등 여러 직군이 섞여 있는 회사의 경우 사무직 대졸 출신의 관리자가 생산직 고졸 사원들의 어려움을 모르는 것과 같다.
“기름밥 먹은 게 올해로 30년이다. 갈수록 골치 아파. 공장에서 CNC(컴퓨터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내장한 수치제어 공작기계 및 이를 응용한 공작 전반) 가공을 하는데. 기계에서 자재가 튀어나와 아예 못쓰게 되는 경우가 많거든. 그때마다 회사에 수차례 보고해도 별다른 조치가 없어. 급기야 가공일 하던 직원 얼굴에 빗맞는 큰 사고가 있었어. 높으신 분들은 중간관리자한테 그 책임을 다 물어. 나 같은 놈 닦달해봤자 해결책이 뭐 있겠어? 실제로는 기계 불량, 기계 노후화 등이 원인인데 엉뚱한 데서 해결책을 찾으라고 하는 거지.”
“그럼 방법은 뭐야?”
“그런 게 있을까 싶다. 직원들 안전 따위는 안중에 없어. 이런 사고가 일어나도 중간관리자만 죽어나지.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안전 수칙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었는지 점검하고, 아니었다면 안전교육을 철저히 하라고 하는 것밖에 없어. 설사 중간관리자가 기계 노후화가 문제라는 걸 깨달아도 기계 교체를 건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돈 드는 일을 누가 좋아하겠어. 그냥 조용히 입 닫고 있는 거지.”
경태는 쓴맛을 다시며 소주잔을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간관리자는 정말 억울해. 분통 터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야. 작은 회사라면 현장 기술자와 높으신 분들 사이에 직접 의사소통이 이뤄지겠지만 그것도 아니니….”
경태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생산 능률이 심하게 떨어지면 회사는 중간관리자를 문책해. 생산직 사원들은 부당한 문책에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중간관리자가 책임을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잘못이 없어도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여건이 못 되거든.”
점심시간은 후다닥 지나가버렸다. 공장으로 다시 향하던 경태는 가다 말고 나를 향해 뒤돌아 덧붙였다.
“참 성호야. 한국에서는 ‘따진다’는 단어가 선배한테 대든다는 말로 쓰이는 거냐? 네가 그 이유를 좀 알아봐라.” 그 이유를 내가 알 리가…. 하여튼 경태야 파이팅해라.
# Episode 5. 문득 돌아보니 ‘아웃사이더’
보험회사 영업맨 심하용. 사실 하용이한테 연락하기 전 살짝 고민했다. 보험 상품에 가입하라고 자꾸 권하면 어쩌나 하고. 솔직하게 돈이 없다고 할까? 아니면 보험 다 들었다고 할까? 어쩌지. 그때 커피숍 안으로 호리호리한 체격,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구김 없이 잘 다려진 정장차림을 한 하용이가 들어왔다.
하용이는 학교 때 말없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그런 하용이가 영업 일을 한다고 해 깜짝 놀랐다. 들리는 말로는 꽤 알아주는 ‘보험 왕’이라고 한다. 역시 사람일은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것 같다.
“애들 말로는 네가 그렇게 잘나간다고 하던데?”
“겨우 밥값 할 뿐이야. 젊을 땐 보험 하나라도 더 팔려고 기를 쓰고 일했는데, 지금은 안 그래. 나름대로 회사 밖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해. 평일 내내 일하고, 주말에도 거래처 사람들이랑 술 마시는 건 아니다 싶더라고. 그렇게도 살아봤는데 어느 순간 내 자신이 너무 공격적으로 변해 있더라고. 요즘도 휴일에 일은 안 해도 어디서 연락 온 건 없는지 계속 e메일을 체크하게 돼.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아예 장소를 옮겨서 딴생각을 하려고 하지. 교회에도 나가고 동호회 활동도 하고.”
오호. 걱정했던 것보다 얘기가 술술 풀리고 있어. 일단 보험 상품 권유 안 하니 마음놓고 대화해도 될 듯.
“인생 1막 때는 정말 전투 태세로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거의 매일 실적 압박에 시달리고, 거래처 접대로도 스트레스 많이 받았지. 이제는 삶에 대해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지려고 애쓰는 중이야. 직장이 아니라 일에 초점을 맞추고, 큰 틀에서 삶을 계획하려고 해.”
직장인이 받는 스트레스의 경중을 따지긴 어렵지만 모르는 사람한테 뭔가를 팔아야 하는 영업직은 다른 직종보다 스트레스가 훨씬 많다. 나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상대방과 합을 맞춰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밖에서 스트레스 받으면 예전에는 동료들하고 풀었는데, 이제는 체력도 안 되고…. 집에 가서 아내랑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위로도 받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엄마랑 애가 얘기하는데 내가 끼면 대화가 끊겨. 아내한테 무슨 이야기냐고 물어보면 ‘다음에 이야기해줄게’ 해. 아웃사이더가 된 거지.”
문득 쳐다본 하용이의 얼굴엔 쓸쓸함이 묻어 있다. 왜 아니겠나. 이 시대 중년이라면 누구나 고독, 허무함, 쓸쓸함을 안고 살거늘.
“돌이켜보면 그동안 나도, 우리 아내도 참 열심히 살아왔더라고. 돈을 벌어오고 살림을 꾸려나가고, 애들 키우고, 양가 부모님 모시고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했지. 그런데도 가끔은 나만 혼자 애쓰는 것 같아서 억울하다는 생각에 말도 안 되는 일로 싸우기도 하고 그랬지. 앞으로는 안 그러려고.”
# Episode 6. 처절했던 순간도 인생인 것을.
하용과 헤어지고 작업실로 돌아오는 길. 며칠 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은 탓일까 성호는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조직을 위해 젊음을 바치고, 가족을 위해 밥벌이의 지겨움마저 꾸역꾸역 참아내야 했던 지난날들. 패기만만했던 까까머리 녀석들은 온데간데없고, 세상 풍파에 휩쓸려 어느덧 쓸쓸한 뒷모습이 아련한 친구들을 떠올리니 괜스레 눈물이 차올랐다.
성호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불쑥 치솟는 서러움을 이기려 오피스텔 계단을 미친듯이 뛰어 올라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성호가 서 있는 곳은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감싸는 오피스텔 옥상.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도심 속 풍경이 웬일인지 낯설게 느껴진다.
성호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린 채 “으악”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이제야 좀 속이 가라앉는 듯하다. 그래, 인생 뭐 있나. 열심히 달려온 만큼 힘들고 처절했던 순간도 많지만 그 또한 인생인 것을.
희뿌연 도심 속 하늘에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가득 찼다. 소질도 없으면서 영화판에 뛰어든 나를 지금껏 물심양면 도와준 동료들의 얼굴도 허공 속에서 명멸했다. 그 순간 성호의 머릿속에 동창회지 인터뷰 기사에 쓸 제목이 떠올랐다. “친구야! 나도 아프고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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