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손바닥만 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지만 지난 연말 간단한 ‘임금 협상’을 했다. 직원들을 한 명씩 편의점 창고로 불러 올해 얼마를 받고 싶은지 물었다. 2019년 법정 최저임금은 시간당 8350원으로 예고돼 있었다.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직원들은 8500원을 이야기했고,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각오하던 금액이다.
편의점을 처음 시작하던 해부터 지금껏 나는 법정 최저임금보다 100~200원이라도 시급을 더 주고 있다.
무슨 호기였는지 모르겠으나 최저시급이 4860원이던 2013년 5300원을 주는 바람에 2014년 최저시급이 5210원으로 인상됐을 때도 우리 편의점은 굳이 시급을 올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장사를 막 시작해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 막연히 ‘시급 많이 주면 더 좋은 사람을 뽑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다.
장사를 해보니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편의점은 ‘사람’이 좌우하는 업종이 아니다. 종업원이 마음에 든다고 손님이 굳이 가까운 편의점을 놔두고 우리 편의점까지 오지도 않고, 능력이 특출한 종업원이라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진열을 잘하거나 매출을 곱절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를 데려다놔도 엇비슷하다. 그래서 편의점 시급은 모든 업종 가운데 늘 법정 최저에 고정돼 있다. 편의점 점주들이 유독 옹졸하고 인색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나 나름의 계산도 있었다. 나는 여러 편의점을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었고, 그러려면 ‘안정’이 필요했다. 편의점은 노동의 금전적 대가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보니 알바들 역시 ‘어디서 일하든 마찬가지’라는 인식을 부지불식간 갖고 있다. 어차피 시급은 최저이니 조금이라도 편한 곳에서 일하려 하고, 살짝 마음이 틀어져도 “여기 아니어도 일할 데는 많아!” 하면서 뛰쳐나간다. 일자리를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나는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정을 담보하는 일종의 보험료로 시간당 100~200원 투자하는 것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운영하는 편의점은 하루 14시간만 영업하고 주말에는 문을 닫으니까, 법정 시급보다 200원을 더 준다 해도 월 6만 원 정도다. 6만 원을 지불해 편안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쯤이야! 다른 점주들은 월 6만 원이면 연간 70만 원이 넘고, 그 정도면 한 달치 전기요금이라며 “작은 돈이라도 아껴야 한다”고 충고했다. “무슨 편의점 하나에 그렇게 공을 들이냐”면서 살짝 비웃는 친구마저 있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경영에 있어 판단의 차이, 혹은 스타일의 차이라 볼 수 있겠다. 다행히 지금껏 망하지 않았고, 그 나름대로 편의점을 잘 운영하고 있다.
알바 자르고 몸으로 때우는 중
그런데 여기에도 분명 ‘임계치’는 있다. 내가 아무리 법정 시급보다 100~200원 더 주는 그 나름대로 호기로운 점주이고, 운이 좋아 장사가 잘되는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해도 견딜 수 있는 한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나 나름대로는 여러 계산법에 따라 우리 점포의 시급 한계치를 7000원 정도로 봤다.
간단히 살펴봐도 처음 편의점을 시작할 때 법정 최저시급이 4800원 수준이고, 지금 1만 원을 넘었으니(주휴수당 등을 포함하면 분명 그렇다!) 6년 새 직원 급여는 2배 이상 늘었다. 점주 처지에서 보면 매월 고정지출은 200만 원 정도 늘어났는데 6년 사이 매출이나 수입은 그 정도로 늘어났느냐? 전혀 아니다. 갈수록 매출은 줄어들고 수입도 줄어드는데 지출은 늘어나고 순수익은 더욱 줄어든다. 그러니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고 긴축 운영을 해봤자 내가 집에 가져다주는 돈은 6년 전에 비해 100만 원가량 줄어든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아이들은 중·고등학생이 되어 들어갈 돈은 갈수록 많아지는데….
하루 14시간, 월 20일 영업하며 직원을 3명 고용하는 내가 이 정도일진대, 24시간 365일 영업하며 직원을 6~7명 고용하는 편의점주들의 압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쉬이 가늠하건대 6년쯤 전에 비해 매월 고정지출이 200만~300만 원 정도 늘어났으리라 추정한다. 편의점 점주가 월 1000만 원 벌어들이는 고수입 자영업자도 아닐진대 월 200만~300만 원 손실이라니, 그 공백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편의점 업계에서 그것은 간단하다. 점주가 자기 몸으로 때우면 된다.
버틸 수 있는 임계치라고 생각한 시급 7000원을 넘어섰을 때, 나도 그 방법을 썼다. 일단 편의점 한 곳을 헐값에 처분했다. 사실 그럭저럭 매출이 나오는 점포였지만 향후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오를 것을 감안하면 빨리 처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고, 그 같은 판단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 점포에서 일하던 직원을 포함해 5명을 한날한시 해고했다. 원래 나는 성격이 똑 부러지지 못해 ‘해고’라는 것에 익숙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을 먹여 살리자고 적자 폭탄을 껴안고 가면 우리 가족의 생계마저 위태로울 형국인데 어느 누가 공멸의 길을 택하겠나. 이것 역시 잘한 판단이었던 것 같다. 해고된 분들에게는 무척이나 미안한 일(이 지면을 빌려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이지만 말이다.
이런 이야기는 지난 수년간 우리 주위에서 목격된 너무도 흔한 사연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최저임금 때문에 어렵다” 하소연하면 대기업이 어떻고 건물주가 어떻고 하면서 자꾸 엉뚱한 이야기로 끌고 가는 분들이 계셔서 우선 이러한 현실부터 꾸밈없이 소개하고 글을 이어나간다.
신호등 하나에도 ‘영향’을 살피는데
‘최저임금 1만 원 시대’라는 희망찬 청사진과 관련해 나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있다. “왜 유독 ‘1만 원’이었어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다. 마라톤도 주행거리가 왜 하필 42.195㎞인지 그 나름의 근거와 기준이 있는데, 최저임금 목표치는 왜 5만 원, 3만 원, 9900원도 아니고 딱 ‘1만 원’인 걸까? 이렇게 물으면 “지난 대통령선거 때 모든 후보자 캠프에서 그런 공약을 내걸었다”고 동문서답하는 분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불성실한 답변 태도를 도시(都是)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분들은 아마 내가 어떤 당파적 견해에서 최저임금 1만 원 노선에 딴죽을 거는 줄 알고 “네가 지지했던 정당도 똑같아!” 하며 피장파장 논법을 쓰는 것 같은데, 그런 오해는 거두시라. 나는 어떤 정당도 지지하지 않았고, 정말 궁금해서 여쭤보는 것이다.
우리가 구체적인 ‘숫자’로써 어떤 목표를 설정하려면 왜 그런 수치가 마련됐는지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우리나라 경제 여건이 이러저러하니까 이런저런 계산법에 의해 모든 근로자에게 시급 1만 원 정도는 맞춰줘야 평균적인 가계 수입이 어느 정도 마련되고, 그래야 최소한 생계가 유지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최저임금이 독재 정권 시대에 내세우던 ‘수출 100억 불 달성’과 같은 ‘돌격 앞으로’식 목표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지금껏 언제 어디서도 그런 차분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정부가 충분히 설명해왔는데 필자가 생업에 바빠 미처 듣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혹시 그런 논거가 존재한다면 알려주시길 부탁드린다. 내가 알기로 최저임금 1만 원은 오롯이 심리적 목표치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 노동의 가치가 고작 1만 원짜리 한 장의 가치도 되지 못하는가, 하는.
어차피 정치는 염원을 실현하는 과정이니까, 어쩌면 그런 염원을 표현하는 일에 과학적 근거가 분명하란 법은 없다. ‘2020년 조국통일 실현’처럼 말이다. 그래도 그것이 정책으로 구현되는 과정에는 분명한 절차와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최저임금 1만 원’과 관련해 내가 갖는 두 번째 의문은 바로 그런 점이다. 필요에 따라 그것을 정치적 구호로 앞세운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정권을 잡았으면 영향을 살펴보고 대안을 마련해놓은 뒤 추진했어야 옳지 않을까. 하다못해 사거리에 신호등을 하나 세우려 해도 교통영향평가 같은 것을 실시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곳에 신호등을 세우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신호 간격을 어느 정도로 해야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지 예측하는 일 말이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것도 매년 15%씩 복리로 껑충껑충 뛰어오르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런 전망과 대책에 대한 속 시원한 연구와 보고자료 역시 나는 찾아보지 못했다. 기이한 침묵이다.
빨강에 나아가고 녹색에 멈춰라
살짝 화제를 돌려보자. 또래보다 일찍 자영업자가 돼 장사를 하다보니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간혹 듣는다. 오죽했으면 나 같은 사람에게 부탁하겠는가 싶어 짠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 밤새 애면글면 얼마나 고민했을까. 전화번호를 눌렀다 멈췄다, 수차례 망설이다 용기 내어 전화를 걸긴 걸었는데 뚜뚜 신호음이 계속되면 그냥 끊어버릴까 다시 망설이고…. 나도 어려운 시절에 수도 없이 그랬다. 그 마음 잘 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미안하다” 이야기하면 상대는 무슨 말인지 곧 알아듣고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장사 잘해라” 하면서 호방하게 전화를 끊는다. 애잔하고, 정말 미안하다.
그런데 계속 매달리는 친구가 있다. ‘얼마나 어려우면 그럴까’ 싶어 마음이 약해지려 하지만, 정말 여윳돈이 없다. 역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데, 간혹, 아주 간혹, 이런 친구가 있다. 물론 친한 친구 사이에 농담이나 투정 비슷하게 하는 말이겠지만, “야, 장사하는 사람이 그깟 100만 원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이럴 때 잠깐 멍해지는 기분이다. 한 번도 장사를 안 해본 사람들이 간단히 그렇게 생각한다. 하루 매출이 수백만 원씩 나온다는 점포의 점주가 ‘그깟’ 하루 매출 정도의 여유가 없어서 그러느냐고. 아서라, 장사를 해봐라. 일 매출 수천만 원 점포를 운영해도 때로 수중에 수십 수백만 원이 없어 쩔쩔매기도 한다. 그것이 장사다.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해 내가 들은 가장 황당한 이야기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깟(!) 몇십, 몇백만 원을 감당하지 못하는 점포는 ‘한계’ 점포니까 망해도 싸다.” “원래 망해야 할 점포가 좀비처럼 연명해온 것이다.” “우리나라엔 자영업자가 너무 많다, 이번 기회에 싹 물갈이돼야 한다.” 혀를 얼얼하게 마비시키는 향신료를 집어삼킨 듯, 이럴 때 잠깐 정신이 아뜩해진다. 한 번도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유지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매사를 단순하게 재단하는 법이고, 죽을힘을 다해 누군가를 먹여 살려보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사연에도 매정한 법이다.
1960~1970년대 중국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이 저지른 패악질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중 웃지 못할 악행 가운데 하나가 신호등의 적색과 녹색을 바꿔버린 일이다. 일반적인 상식과 관행으로 우리는 빨강 불에 멈추고 녹색 불에 전진한다. 홍위병들은 그게 잘못된 것이라고, 어떻게 ‘혁명의 색’인 빨강에 멈출 수 있느냐고, 반동적인 발상이라고, 빨강과 녹색의 역할을 바꿔버렸다. “빨강에 나아가고, 녹색에 멈춰라” 이렇게 선언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말할 것도 없다. 뒤죽박죽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 사고가 줄을 지었다. 과연 혁명 ‘소장(小將·홍위병)’다운 발상이었다.
지나친 비유라 탓할지 모르지만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사고의 본질은 동서고금 비슷하다. 물론 최저임금의 가파른 상승을 주도한 분들의 사고에는 “노동자에게 최소한 시간당 1만 원 이상의 대가는 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해서 소득이 늘어나면 소비가 늘어나고, 또 그렇게 해서 경제가 부흥할 것이란 그 나름의 경제 이론을 갖고 있다는 사실 또한 넉넉히 알고 있다. 하지만 정책의 이유를 현실에 근거하지 않고 ‘당위성’에 두는 본질은 적색과 녹색을 하루아침에 바꿔버린 역사를 얼핏 떠올리게 만든다. 당사자들은 이런 비유에 무척 마음 상하겠지만, 정권을 책임지고 있는 만큼 비판의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겠다.
손톱과 발톱, 당신의 선택은?
자영업자의 한 사람으로, 최저임금을 둘러싼 지난 2년간의 경제정책에 대해 의견을 묻는다면 “그냥 병 주고 약 주는 과정 아니었나요?”라고 냉정하게 말하겠다. 물론 기존의 임금 수준이 완벽하게 합리적이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 정책의 주요 목록 가운데 하나로 대기시켜뒀다가 차례차례 꺼내놓을 일을 마치 최우선 과제인 것처럼 어째 그리 허겁지겁 서둘렀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자영업자들이 아우성을 치니까 일자리안정자금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취업률이 하락하고 실업자가 늘어나니까 실업급여를 늘리고, 근로장려금을 대폭 늘렸다고 또 자랑하고, 그걸 받아가라고 공무원들을 총동원해 전화기에 매달리도록 만들고…. 이게 대체 뭐하는 일인지 어리둥절하다.
시장의 충격을 어떻게든 최소화하며 진행해야 할 일을 될 대로 되라는 듯 단박에 실시하고, 탈이 나자 부랴부랴 수습하고, 알고 보면 세금으로 메우면서 마치 자기 주머니 털어 복구하는 양 생색을 내고…. 어차피 정치의 속성은 그런 것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다. 멀쩡한 밭을 막 파헤쳐놓은 후, 망연자실해 있는 농민들에게 돈으로 보상해주겠다 하고, 그러면서 “토질이 좋아졌으니 두고 보시라” 자랑하는 모양새인데, 심을 작물이 없고, 내다 팔 시장이 없고, 농사지을 농부들이 떠나버렸는데 토질만 좋아지면 뭐하나. 이건 마치 적색과 녹색의 역할을 바꿔놓은 후 사고가 잇따르자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우리 혁명정부의 발 빠른 대처로 더 큰 피해를 막았다”고 자화자찬하는 모양이랄까. 안 해도 될 일을 기어이 추진해놓고 거기서 의미를 찾는다니, 이 무슨 역사적 복고인가!
결론으로 나아가자. 어떤 신입사원 연수 세미나에서 강사가 수강생 가운데 한 사람을 지목해 일어서게 한 후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하나씩 있다”고 알린다. 그 수강생이 바로 당신이다. 먼저 나쁜 뉴스. 강사는 “지금 당장 당신의 손톱과 발톱을 뽑아버리겠다”고 통보(?)한다. 가방에서 섬뜩한 펜치까지 꺼내 보여준다. 당신은 흠칫 놀라겠지. 다음으로 좋은 뉴스. 강사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손톱과 발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자유를 주겠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우물쭈물 망설이는 사이 강사는 외친다. “10초 안에 말하지 않으면 몽땅 뽑아버리겠다!” 10, 9, 8, 7, 6…. 쓰러진 권투선수를 대하듯 날카로운 카운트가 무심하게 이어진다. 당신은 당황한다. 숫자가 1에 닿을 때쯤 부랴부랴 외친다. “바, 바, 발톱!”
강사는 “왜 발톱을 선택했느냐”고 묻는다. 당신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니까 할 수 없이 발톱으로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선택이 주어진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일단 덮어둔다. 강사는 당신과 따뜻하게 포옹하며 이렇게 격려한다. “웰컴 투 리얼 라이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민심은 호랑이보다 무섭다
이상적인 선택은 ‘손톱이냐 발톱이냐’ 하는 엉뚱한 선택 자체를 거부하는 삶이다. 지금보다 젊었을 적 나도 그랬고,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한때는(혹은 지금도) 그런 다짐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리얼 라이프’는 종종 최악이냐 차악이냐를 강요받는다. 그 대표적 실례가 투표이고, 우리는 지금껏 ‘차악’(혹은 ‘차선’)이라 생각하는 정당이나 후보를 선택해왔다. 분명 문재인 정부가 지고지순 최선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국민은 이 정부를 선택했다. 위정자들은 그 점을 알고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정부와 여당은 이렇게 믿는 것 같다. “설마 국민이 최악으로의 회귀를 선택하겠어?” 이런 식으로 자신만만하게 사고하면서 ‘20년 장기집권’까지 서슴없이 공석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다. 노파심에 덧붙이건대, 나도 최악만은 피하고픈 유권자다. 그 나름의 충심으로 이런 글도 쓰고 있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지만 민심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민심은 현명하지만 때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총선은 내년에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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