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말, 주요 IT전문지와 해외 일간지들을 떠들썩하게 한 소식이 있었다. 삼성전자가 올 상반기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S10’에 암호화폐 지갑을 탑재한다는 것. 이는 삼성전자가 한국과 유럽, 영국 특허청에 블록체인 상표를 출원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널리 확산됐다. 한때 국내외에서 투기 광풍을 일으켰던 암호화폐, 특히 ‘비트코인’으로 대변되는 각종 코인은 거품이 꺼짐과 동시에 많은 이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은 여전히 유망하고, 이 기술을 활용한 ‘암호화폐 지갑’은 다소 부정적인 인식을 접고 일반인의 생활에 손쉽게 녹아들 수 있는 서비스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암호화폐 지갑은 다른 계좌로 디지털 통화를 저축하거나 송·수신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은행계좌와 같다. 저축해둔 암호화폐를 각종 쇼핑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암호화폐를 주고받거나 저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암호화폐 지갑이 필요하다.
삼성은 왜 ‘암호화폐 지갑’에 손을 댈까
삼성전자가 실제 스마트폰에 암호화폐 지갑을 탑재할지 여부는 갤럭시S10이 모습을 드러내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암호화폐 지갑이 탑재된다하더라도 실제 사용은 당장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삼성이든 애플이든, 지금까지 어떤 서비스를 도입하기에 앞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사전에 앱을 설치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한국과 유럽, 영국 특허청에 ‘삼성 크립토 월렛(Samsung Crypto Wallet)’ ‘삼성 블록체인 월렛(Samsung Blockchain Wallet)’ ‘블록체인 키스토어(Blockchain KeyStore)’ ‘블록체인 키 박스(Blockchain key box)’ ‘블록체인 코어(Blockchain Core)’ 등 5건의 블록체인 상표를 출원했다. 크립토 월렛이나 블록체인 월렛은 말 그대로 암호화폐 지갑을 의미하며, 키스토어나 키 박스, 코어 등은 암호화폐를 보관하고 관리하기 위한 기술일 것으로 짐작된다.
암호화폐 지갑은 생성 과정에서 일종의 비밀번호와 같은 ‘개인키(프라이빗 키)’를 부여하고, 다시 이를 이용해 거래에 사용할 통장 같은 ‘공개키(퍼블릭 키)’를 만든다. 투자자는 이 공개키를 통해 암호화폐 거래와 잔액을 확인할 수 있고, 개인키로 거래에 나서게 된다.
따라서 암호화폐 지갑을 사용할 때 개인키 관리가 대단히 중요한데,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특허출원한 블록체인 키스토어가 개인키를 담고 있는 암호화된 파일일 것으로, 키 박스는 스마트 계약을 위한 서명을 대신해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복잡한 사용법을 좀 더 단순화하기 위한 기술일 것이란 추측이다.
블록체인 코어는 개발자를 위한 기술일 가능성이 높다. 암호화폐 지갑 사용을 활성화하려면 당연히 거래나 소비로 연결될 서비스가 늘어나야 하고, 더 많은 개발자가 삼성전자 암호화폐 지갑 서비스를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성전자가 왜 암호화폐 지갑에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암호화폐 지갑이 탑재된다고 해서 스마트폰에서 곧바로 비트코인을 채굴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성공 요인 중 하나인 ‘삼성페이’ 확장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삼성페이 등에 업고 암호화폐 시장 노크
삼성페이는 삼성전자 스마트폰 이용자 확대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안팎에서 평가받는다. 여기에는 지난 2015년 2월 인수한 루프페이의 마크네틱 보안 전송(MST) 기술이 결정적이었는데, 별도의 카드 결제기를 설치하지 않고 일반 결제기로도 사용 가능하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당시 먼저 출시된 애플페이는 별도 단말기가 설치된 주요 소매점에서만 결제할 수 있었다.
판매자나 소비자 모두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한 덕분에 삼성페이는 국내외에서 크게 성장했다. 모바일 앱 분석업체 와이즈앱이 국내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이용자의 간편결제 앱 사용자 수 현황을 조사한 결과 2018년 10월 기준 삼성페이 이용자 수는 1040만 명으로 전년 동기 660만 명 대비 58% 성장했다. 지난해 4월 기준 삼성페이 누적 결제액은 18조 원을 돌파했다.
삼성페이는 최근 결제 가능 시간을 연장하고 해외송금 서비스를 도입했으며, 이체 서비스 ‘최근 입금계좌 기능’ 등을 제공하며 서비스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다. 여기에 암호화폐 지갑이 더해지면 삼성페이는 핀테크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는 이더리움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출시 때는 더 많은 암호화폐를 지원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자체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인 C랩 내에 블록체인 기반 핀테크 스타트업 모인과 코인덕을 참가시키는 등 블록체인 활용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 모인은 미국과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 4개국에 송금할 수 있는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다. 코인덕은 지난해 1월 세계 최초로 오프라인 매장에서 암호화폐 이더리움으로 결제할 수 있는 코인덕 페이먼트를 상용화했고, 스마트폰 개발사 시린랩스와 암호화폐 결제·송금 기술을 탑재하기 위한 업무협약을 맺기도 했다.
스마트폰 제조사 가운데 암호화폐 지원을 시도하는 것은 삼성전자만이 아니다. 앞서 대만 스마트폰 제조사 HTC는 암호화폐를 보관할 수 있는 하드웨어 지갑 ‘자이온(Zion)’을 탑재한 ‘엑소더스 원’을 판매했다가 중단한 바 있다. 엑소더스 원은 암호화폐 지갑이 문제가 됐다기보다 제품 구매를 암호화폐로만 가능하게 했는데, 암호화폐 가치가 절반 이하로 급락한 점이 판매 중단의 배경인 것으로 추정된다.
핫 월렛 or 콜드 월렛…삼성의 선택은?
암호화폐 지갑은 온라인 연결 유무에 따라 ‘핫 월렛(Hot wallet)’과 ‘콜드 월렛(Cold wallet)’으로 구분된다. 핫 월렛은 온라인 상태로 실시간 거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지갑을 말한다. 실시간 인터넷으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지만 온라인에 연결돼 있으므로 해킹 등 보안 문제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콜드 월렛은 평소에는 USB처럼 인터넷이 차단된 하드웨어 기기에 암호화폐를 보관하는 오프라인 상태로 돼 있다. 실시간 거래는 불가능하지만, 거래를 하기 위해 별도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보안에는 더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핫 월렛은 금융거래 목적으로, 콜드 월렛은 보관 목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기는 하다. 그러나 개인 이용자는 주로 핫 월렛을, 거래소나 기업 같은 경우에는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하며 안전을 위해 상당 부분을 콜드 월렛에 보관한다.
지난해 암호화폐 거래소 빗썸은 고객에게 350억 원 규모 암호화폐가 탈취됐다면서 입금을 중단해달라는 공지를 돌린 바 있다. 당시 빗썸은 “유실된 암호화폐를 회사 소유분으로 충당할 계획이며, 고객들의 자산 전량을 ‘안전한 콜드 월렛’ 등에 이동 조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가 갤럭시S10에 탑재할 것으로 예상되는 암호화폐 지갑은 핫 월렛과 콜드 월렛을 통합한 형태일 것으로 보인다. 소유자의 허가가 있을 때만 온라인에 연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갤럭시S10에 탑재된다면 사용자 지문 인식을 통해 식별할 가능성이 높다.
암호화폐 지갑 서비스, 이미 많이 있는데…
암호화폐 지갑은 이미 수년 전부터 소개된 만큼 그리 낯선 개념은 아니다. 지금도 구글 플레이스토어에 들어가면 렛저(Ledger)나 코인페이먼츠(Coinpayments) 등의 암호화폐 지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암호화폐 지갑은 소유 형태에 따라 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OTP)처럼 직접 휴대하는 형태나 온라인상으로 보유하는 형태, 모바일 앱 형태, 데스크톱PC 형태 등으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암호화폐 지갑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업체 렛저의 ‘렛저 나노S’는 USB 형태로 휴대할 수 있으며, ‘렛저 블루’는 작은 태블릿과 같은 형태다. USB 형태의 암호화폐 지갑은 콜드 월렛으로 분류된다. 코인페이먼츠는 웹 기반 디지털 화폐 지갑으로, 1200개 이상의 암호화폐를 지원한다. 에지월렛(Edge Wallet)은 모바일 앱 형태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비트베리, 후오비월렛, 소버린 월렛, 올코인 월렛 등 다양한 월렛이 모바일 앱 마켓에 나와 있다. SK플래닛은 기존의 모바일 월렛 ‘시럽’ 서비스에 암호화폐 전자지갑을 추가했다.
무엇을 선택하든 자유지만, 암호화폐 지갑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우선 개인키를 잃어버리거나 타인에게 노출했을 경우 보유하고 있던 암호화폐도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해야 하므로 특히나 보안이 철저한지, 적응이 용이한지 등을 사전에 파악해야 한다. 또 대부분의 국가에서 암호화폐를 법정통화로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잘못 선택할 경우에는 사기를 당하거나 낭패를 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국내 암호화폐 거래 사이트 지닉스는 지난해 9월 암호화폐로 투자금을 모아 다른 암호화폐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형태의 펀드 상품을 출시했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의 심사를 거치지 않은 것은 물론 자본시장법상 위반 소지가 크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폐업에 이른 사례가 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오는 2020년 도쿄 하계올림픽 이전에 암호화폐 결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 계획이라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위한 결제 시장은 내년을 계기로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자사 스마트폰에 암호화폐 지갑을 탑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기존에 스타트업이 뛰어들었던 암호화폐 지갑 서비스마저 대기업이 장악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하지만 관련 업계는 삼성전자가 스마트폰에 암호화폐 지갑을 탑재할 가능성에 대해 일단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암호화폐 지갑 보급률이 그리 높지 않은 상황에서 삼성전자라는 글로벌 1위 스마트폰 제조사의 제품에 기본적으로 탑재된다면 인지도와 활용도가 그만큼 높아질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다. 아울러 다른 제조사들도 스마트폰 탑재를 늘릴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그저 암호화폐 지갑을 탑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암호화폐나 블록체인 모두 활성화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온다. 최인욱 루트원 CMO(최고마케팅책임자)는 “스마트폰에 암호화폐 지갑을 탑재한다면 일단 이용자의 접근성은 높아지겠지만, 그것만으로는 거래를 일으키기에 불충분하다. 결국 암호화폐로 거래하거나 물건을 구입해야겠다는 니즈가 있어야 한다”며 “기업이나 가맹점, 마트 등의 기업체와 연결할 수 있는 솔루션이 있다면 긍정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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