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게임사 넥슨이 매물로 나왔다. 창업주 김정주 NXC 대표는 자신과 아내 유정현 감사 등이 보유한 NXC 지분 전량(98.64%)의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NXC는 넥슨을 비롯해 유아용품업체 스토케, 블록체인 사업체 코빗과 비트스탬프 지주사다. 김 대표가 NXC 지분을 시장에 내놓은 것은 넥슨을 처분하기 위해서다. 2018년 기준 매출 2조5000억 원, 순이익 1조 원을 기록한 알짜 회사를 파는 이유는 뭘까?
넥슨 매각을 두고 여러 추측이 나오지만 명확한 것은 없다. 김정주 대표는 매각설이 불거진 후 “회사 성장을 위한 최선의 방안은 무엇인지, 저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 늘 주변에 묻고 스스로 되물으며 고민했다”면서 “지금도 새롭고 도전적인 일에 뛰어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넥슨을 세계에서 더욱 경쟁력 있는 회사로 만들 여러 방안을 놓고 숙고 중”이라고 밝혔다.
그가 밝힌 ‘새로운 일’과 ‘넥슨을 세계에서 경쟁력 있는 회사로 만드는 일’을 키워드로 놓고 보면 어느 정도 실마리가 풀린다.
‘차이나 리스크’ 부딪힌 넥슨
넥슨은 NXC를 정점으로 일본 증시에 상장한 자회사 넥슨(구 넥슨재팬)이 넥슨코리아, 넥슨유럽, 넥슨아메리카를 거느린다. 기업구조는 복잡하지만 주수입원은 온라인 게임 ‘던전앤파이터’ ‘메이플스토리’ ‘피파온라인’으로 압축된다. 이 중 던전앤파이터는 넥슨을 이해하는 핵심 고리다.
넥슨코리아 자회사 네오플이 만든 ‘던전앤파이터’는 텐센트를 통해 2008년 중국 시장에 진출한 후 흥행을 이어갔다. 네오플은 2017년 국내 게임사 최초로 영업이익 1조 원을 돌파했다. 이익률 92%다. 매출 중 중국 텐센트에서 받는 로열티 비중이 90%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같은 해 넥슨은 연결 기준으로 8856억 원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넥슨 실적은 중국 내 ‘던전앤파이터’ 성적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셈이다.
중국 게임 시장은 최근 안개 속이다. 중국은 2017년부터 신규 한국 게임에 판호(版號·유통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외국 게임에서 시작된 판호 중지는 곧 중국 게임에까지 퍼져나갔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영향력 강화와 동시에 진행된 문화·인터넷 통제의 일환으로 분석된다.
2018년 말부터 중국 게임을 시작으로 조금씩 판호가 나고 있지만 언제 다시 규제가 시작될지 모른다. ‘던전앤파이터’처럼 이미 서비스 중인 게임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내 게임 사업 환경은 갈수록 험악해지는 분위기다.
중국은 지난해 ‘청소년 시력보호’를 명분으로 게임총량제 도입을 발표했다. 텐센트 등 대형 게임사는 정부 규제에 앞서 자체적으로 청소년 게이머의 접속 시간을 제한하는 등 자율 규제에 나섰다. 이런 중국 게임 시장은 넥슨에는 큰 리스크다. 그렇다고 당장 ‘던전앤파이터’를 대체할만한 신규 상품도 발굴하기 어렵다. 김 대표 처지에서는 중국 내 ‘던전앤파이터’ 성적이 매년 정점을 경신하는 지금이 넥슨 매각 적기인 셈이다.
김 대표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개발자보다는 사업가로서 정체성이 강한 인물이다. 넥슨이 게임 사업을 시작한 계기도 김 대표의 서울대, 카이스트 동기인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역할이 컸다. 김 대표는 게임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기보다는 1990년대 후반 이후 게임 산업의 폭발적 성장에서 비즈니스 동력을 찾아왔다. 성장 동력이 꺾인 사업에 더는 매력을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넥슨은 한국에서 시작해 일본 시장과 중국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한 회사다. 2019년 현재 게임 시장으로 한정하면 한국은 포화 상태이고 중국은 불확실하며, 일본은 정체됐다. 오웬 마호니 넥슨 대표는 올해 실적 발표 콘퍼런스 콜에서 “김정주 대표가 경영에 관여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넥슨 경영에 관여하지도 않고 불확실성과 기업 가치가 동시에 커져가는 상황에서 오너인 김 대표가 취할 선택지 중 하나가 ‘매각’인 것은 이상하지 않다.
새 주인은?
넥슨이 팔린다면 새 주인은 누가 될까? 3월 현재 투자은행 업계에 따르면 넥슨 예비 입찰자 중 적격인수후보(쇼트리스트)에 오른 곳은 카카오, MBK파트너스, 텐센트, 베인캐피털 그리고 해외 사모펀드 1곳이다. 넷마블은 MBK와 손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현재 카카오 2대 주주와 넷마블 3대 주주는 중국 텐센트다. 둘 중 어느 업체가 넥슨을 인수하더라도 텐센트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카카오와 넷마블 두 회사 모두 단독으로 넥슨 인수를 실행하기는 불가능하다. 넷마블과 카카오는 적어도 15조 원이 넘는 것으로 예상되는 NXC 지분 딜에 참여할 현금이 없다. 카카오는 부채가 2조 원이 넘는다. 따라서 재무적 투자자와의 연대가 필수다.
넷마블은 ‘국내 자본에 의한 넥슨 인수’를 내세웠다. MBK파트너스는 김병주 회장이 이끄는 국내 최대 규모 사모펀드지만 대부분 펀드를 해외 자금으로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텐센트가 MBK를 통해 넷마블의 넥슨 인수에 자금을 댄다고 해도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텐센트는 이 딜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뛰어들까? 게임, 투자업계에서는 NXC가 이미 지난해 텐센트에 매각 관련 제안을 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 제안이 불발되자 올 초 공개 딜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투자은행이 넥슨 매각에 경쟁을 붙여 몸값을 높이거나 텐센트 참여를 유도한다는 루머다. 그만큼 텐센트의 의중이 베일에 가려 있다는 방증이다. 텐센트의 예비 입찰 참여 목적은 다른 경쟁자를 견제하려는 데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넷마블이나 카카오를 통해 간접 투자가 가능하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참여하든 하지 않든 국내 기업에 의한 넥슨 인수는 ‘해외에 빼앗기지 않았다’는 명분 외에는 사는 쪽이나 파는 쪽이나 별로 실익이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말한 ‘넥슨을 세계에서 더욱 경쟁력 있는 회사로 만드는 여러 방안’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텐센트의 처지에선 네오플에 건네는 연간 1조 원 로열티를 이익으로 돌리는 것 외에 실리가 없다. 텐센트는 2017년 매출 43조 원을 기록했다. 중국 내부에서 게임과 인터넷 산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시점에 해외 기업 인수에 10조 원 넘는 돈을 쓰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북미나 유럽에 기반을 둔 서구권 자본이 넥슨을 인수하는 그림은 김 대표가 밝힌 ‘넥슨의 글로벌화’와 좀 더 가깝다. 이 경우 넥슨에 부족한 서구권 시장 진출 교두보를 만들 수 있다. 특히 디즈니나 드림웍스처럼 글로벌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한 업체가 중심이 된다면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존, 일렉트로닉아츠(EA), 컴캐스트 등 북미 정보통신(IT) 업체는 아직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아마존은 NXC 지분 매각 예비 입찰 참여 여부를 묻는 질문에 “루머와 추측에는 답하지 않는다”고 했다. 공식화하지 않았지만 이들 업체가 넥슨 매입에 무관심할 이유는 없다. 15조 원이 넘는 자금이 필요한 빅딜인 만큼 우선협상대상자가 선정되면 추가적으로 뛰어들 수 있다.
아마존은 클라우드 비즈니스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스트리밍 게임 사업을 준비 중이다. 넥슨처럼 개발력과 IP를 갖춘 회사를 인수하면 아시아 콘텐츠 시장에서 영향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
EA는 오웬 마호니 넥슨 대표의 전 직장이다. 마호니 대표는 넥슨에 최고재무책임자(CFO)로 합류하기 전 EA 수석 부사장으로 투자를 총괄했다. EA가 인수 주체로 들어온다면 넥슨 경영자로 자리를 더 오래 지킬 수 있다.
매각 후 경우의 수
넥슨의 새 주인만큼 궁금증을 자아내는 건 김 대표의 다음 행보다. NXC가 가진 넥슨 지분 가치는 6조 원 규모다. 여기에 코빗과 스토케 등 다른 회사 지분을 포함하면 김 대표가 내놓은 매물 가치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더해 10조 원에 근접한다. 넥슨이 보유한 현금 4조5000억 원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15조 원에 달하는 매각 대금은 국내 기업 인수합병(M&A) 사상 역대 최대 규모다.
김 대표는 2월 21일 넥슨과 대전시의 대전어린이재활병원 건립 업무협약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NXC 지분 매각 예비 입찰 마감 날이었다. 이 병원은 넥슨코리아와 김 대표가 사재를 출연해 약 100억 원을 지원한다. 넥슨은 김 대표의 등장에 “큰 의미는 없다”며 선을 그었지만 그동안 외부 활동을 자제해온 김 대표가 공개석상에 등장한 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김 대표가 개인 브랜딩을 시작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대표는 매각설 이후 공식 발표를 통해 “어떤 경우라도 우리 사회로부터 받은 많은 혜택에 보답하는 길을 찾을 것”이라면서 “제가 지금껏 약속드린 사항들도 성실히 지켜나가겠다”고 밝혔다.
넥슨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들 말을 종합하면 김 대표의 NXC 지분 매각 의지는 확고하다. 한국에서 김 대표의 의사를 가장 먼저 안 것은 박지원 전 넥슨코리아 대표와 한경택 넥슨코리아 최고재무책임자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 최측근인 이들이 매각을 말렸지만 김 대표가 의지를 꺾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김정주 대표가 넥슨을 못 팔 수 있어도 안 팔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넥슨 매각을 추진하는 이유는 현재로선 ‘다른 사업 아이템을 발굴해서’라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매각 대금을 가지고 다른 사업을 시작할 것이란 예상이다. 앞서 김 대표가 언급한 ‘새로운 도전’과 맥락이 같다. 김 대표는 수년간 블록체인에 큰 관심을 보였다. 블록체인은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인터넷’으로 각광받고 있다. 다만 현재 NXC가 가진 코빗, 비트스탬프 등 관련 업체를 운영하려면 NXC 지분 매각 후 이들 기업만 따로 되사는 방식을 거쳐야 한다. 매각 대금을 바탕으로 관련 사업체에 전문적으로 투자할 가능성도 높다.
“김정주는 손해 볼 게 없다”
넥슨이 결국 새 주인을 못 찾을 가능성도 여전하다. 매물 덩치가 워낙 크고 인수자 처지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 김 대표도 ‘매각한다’고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넥슨을 글로벌 업체로 만들 다양한 방법을 고민한다’는 애매모호한 설명 속에서 매수 의향자를 알아본 것에 가깝다.
넥슨 매각이 불발될 경우 김 대표의 경영권이 약해질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까지는 상황이 반대로 전개되는 모양새다. 넥슨 내·외부 관계자들 말을 종합하면 ‘매각설’ 이후 넥슨 각 계열사 대표, 프로젝트 리더들은 업무를 더 꼼꼼히 챙기고 있다. 매각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단 존재감을 나타내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넥슨 직원은 “김정주 대표가 이번 매각설을 통해 던진 메시지가 작지 않다”고 전했다. 수년간 경영에 참여하지 않던 김 대표가 말 한마디로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주가도 연일 상승하고 있다. 지난해 말 1400엔 수준이던 넥슨 주가는 불과 두 달 만에 20%포인트 상승했다. 매각설 말고는 다른 변수가 없다.
넥슨의 기업 가치를 확인한 의미도 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일단 대외적으로 ‘팔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고, 예비 입찰을 거치며 기업 가치를 공인받게 될 것”이라면서 “이번에 딜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글로벌 사업자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사겠다’는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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